생활의 유익/불교, 타종교

[스크랩] 불교 산책|사구게(四句偈)로 경전을 읽는다

잔잔한 시냇가 2009. 8. 21. 08:32

 






경전에 나타난 사구게를 해설하면서 제일 먼저(1월호) 『금강경』의 사구게를 해설한 바 있었다. 그러나 『금강경』에는 이외에도 사구게로 거론되는 또 다른 게송들이 있다. 일단 한 경전의 사구게라고 거론된 경귀(經句)는 그 경의 중요한 내용이 압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금 해설하려고 하는 『금강경』의 또 다른 사구게도 불교 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일 육신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으로
절대로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위 게송은 육체와 음성을 통해서 여래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어째서 이러한 말씀을 이 경에서 설하게 된 것일까.

역사 속에서 부처님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이다. 석가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고, 또 깨달음을 이루셨고, 그 깨달으신 내용을 가르쳐주셨고, 또 80세에 열반에 드시어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 
만일 부처님은 돌아가셨고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부처님의 이름을 불러도 부처님은 들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기원을 한다 해도, 부처님은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육신은 인도의 장례법에 의해 화장되었고, 화장된 유골은 재가 신도들에 의해서 특별히 모셔졌다. 이 화장 후에 나온 유골을 고대 인도 말로는 사리(舍利·s、arira)라고 했고, 이 사리를 모신 탑을 불탑, 또는 사리탑이라고 불렸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많은 제자들, 특히 재가 제자들은 이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진 탑에 모여서, 마치 부처님이 이곳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예배하고 기원했다. 이 같은 형태의 신앙을 불탑 신앙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재세시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그려서 잘 모시라는 가르침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화장 후에 사리를 봉안하라는 말씀도 없었다.
불교는 인간의 사후 육신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육신이란 여러 요소가 화합하였다가 또 흩어지는 것으로 잘 봉안할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그 사리를 수습하여 사리탑(stu-pa)을 건립한 것은 부처님의 뜻에 위배된 거역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처님 열반 당시의 재가 불자들은 존경하옵는 스승님의 사리를 다투어 모시기를 희망했고 그 결과, 이 같은 재가 불자들에 의해서 사리탑이 건립된 것이다. 이 경우에도 출가 제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리탑을 건립하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의 불탑(사리탑)은 출가자들이 생활하고 수도하는 승원(sam.gha-a-ra-ma)에 건립되지 않았고, 승원 밖에 세워졌다.
불상이나 불화는 이보다 500~600년이 지나서 조성되어 예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
그러나 초기 대승불교는 이 같은 불탑 신앙, 즉 사리 신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진정한 부처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사리, 즉 부처님의 유골은 부처라고 볼 수 없다. 부처란 깨달음을 통해서 부처가 된 것이지, 육체를 통해서 부처가 된 것은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는 깨달음을 담고 있는 하나의 용기에 불과한 것이지 부처, 그 자체는 아니다.
부처란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깨달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이 같은 물음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졌고, 그 가르침은 경전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이유로 부처님의 사리를 신앙하던 불탑 신앙은 경전 신앙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진정한 부처는 경전 속에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불탑 신앙을 거부하고 경전 신앙을 강조하는 근거의 한 예로서 『금강경』에서는 “이 경전이 있는 곳이 바로 부처님이 있는 곳이다(若是經典 所在之處 卽爲有佛)”라고 하였다.
이 같은 초기 대승불교의 사상적 맥락에서 보면, 앞에서 거론되었던, 사구게에 여래(如來)는 육신을 통해서나 음성을 통해서는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만약에 육신이나 음성을 통해서 보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다. 즉 불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본 사구게는 불교의 진실이 어떤 것인가를 직설적으로 가르친 것이며, 진정한 부처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부연해서 살펴야 할 것은, 『금강경』에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호칭이 불·세존·여래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용례를 자세히 살피면, 불(佛)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주체가 될 경우에만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부처(佛)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등과 같은 경우다.
세존(世尊)이라고 쓰는 경우는 제자(수보리)가 부처님을 부를 때, ‘부처님이시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세존이시여’라고 부르는 경우이다. 세 번째 여래(如來)라는 표현은 설법의 주체자도 아니고, 제자들이 부르는 호칭도 아니다. 『금강경』에서 여래라는 부처님의 호칭은 명호(名號)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래는 어떤 뜻으로 쓰이고 있을까. 본 사구게에서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할 때, 여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의 부처님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금강경』에서의 여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그 여래를 눈으로 보려고 하거나 그 여래의 말씀을 음성으로 들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의 길(邪道)로 가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불교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邪道)를 수행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깊고 무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권기종_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 불교대 학장, 불교문화연구원 원장, 사회교육원 원장 및 한국불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원각불교사상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권기종 교수와 함께하는 생활 속의 불교』, 『금강경강의』, 『고려시대 선사상 연구』, 『불교사상사 연구』(상하) 등과 다수의 논문이 있다
 
 
 
 
 
<출처;buddhistcultu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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