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유익/불교, 타종교

[스크랩] 한국에서 유교와 기독교. 서양의 눈에 비친 유교

잔잔한 시냇가 2010. 9. 30. 14:00

 

                                미래전략연구원 미래전략포럼 
                           기획위원회 워크샵(제7차 초청토론회)


                  한국에서 유교와 기독교 - 독선과 포용의 궤적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한국종교의 전통과 현실
 종교는 인간의 삶과 함께 시작하였고 사회·문명의 발전과 함께 성숙하여 왔다. 따
라서 한국종교도 언제나 한국역사와 함께 변동하여 왔고, 한국사회가 지닌 문제들
을 그 속에 안고 있다. 그러나 한국종교와 한국역사의 변동은 항상 주변국가의 영
향을 받아 왔던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당대(唐代)의 주류를 이루었던 삼교조화론(三敎調和論)을 받아들여 삼교(三敎: 儒, 佛, 仙)가 병행하며 조화를 이루어 왔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원·명대(元明代)에 국가통치원리로 확립되었던 도학(道學) - 주자학(朱子學)의 유교이념을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 확립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종교로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에 유입되어 짧은 기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처럼 한국종교의 현실은 분명히 한국사회 속에서 배양되고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주변국가에서 불어오는 외풍의 방향을 감지하여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종교는 사회의 안정과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발전의
장애요인이 되거나 침체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불교는 고려말기에 교단이 과도하게 팽창하면서 국가의 쇠망을 초래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마찬기지로 유교는 조선사회의 안정과 문화기반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 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통의식으로 시대변화에 적응력을 상실하면 서 조선왕조의 멸망을 자초하는 직접적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
서 그 사회가 융성할 때에는 종교도 건강하고, 그 사회가 쇠망할 때에는 종교도 병
들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종교교단의 지형도를 보면, 우선 무속(巫俗)을 비롯한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유교· 불교의 전통종교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18세기 후반에 전 래하기 시작한 천주교와 19세기말에 전래하기 시작한 개신교가 서양종교로서 근대 적 변혁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다양한 민족종교 내지 신종교(新宗敎: 東學 - 天道敎· 甑山敎· 大倧敎· 圓佛敎 등)교단이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일어났다가 부침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한국사회는 단일종교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교들이 병행하면서 갈등과 화합을 반복해왔던 다종교(多宗敎)사회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사회통합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분열할 뿐만 아니라 사회분열
의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종교의 독선적·배타적 태도는 타종교와 대립을 일으키
고, 같은 종파 안에서도 교리적 내지 의례적 차이에 따라 분열하여 대립을 심화시
키기도 한다. 불교의 종파분열은 격심한 대립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
선시대 유교의 학파분열은 정치적 당파분열과 연결되면서 사회분열을 고착화시켰으며,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유교가 붕괴된 다음에도 여전히 사회분열의 요인으로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종교든지 자신의 진실성을 표방하여 독선적
내지 배타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지도 기능이나 사회구원 기능
으로서 희망의 역할에 못지 않게 사회분열과 파괴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위험요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전제로 우리의 종교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 도학의 독선에 대한 비판
 도학이념의 유교 지식인들은 엄격한 정통주의 입장에 따라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 타종교에 대해 이단으로 배척할 뿐만 아니라, 유교 안에서도 경전의 해석이나 우주론과 인성론의 인식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다른 학파에 대해서도 이단으로 규정하여 배척하는 폐쇄적 엄격성을 지키고 있었다.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말씀마다 모두 옳은 자는 주자요, 일마다 모두 마땅한 자는 주자이다”<.宋子大全., 부록 권17, ‘語錄’>라고 하여, 주자를 한 글자의 오류도 없는 진리의 기준으로 절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당시 주자의 경전해석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던 박세당(西溪 朴世堂)과 윤휴(白湖尹)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윤휴는 “주자가 해석한 것은 경서(經書)요, 이미 여러 이론(說)을 모으고 절충하여 하나의 이론을 이룬 것이다. …혹시 이론에 견해가 투명하지 못하거나, 실행에 이르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토론하여 고쳤으니, 머물지 않고 고쳐나가기를 죽을때 까지 그치지 않았다”<.白湖全書., 권36, ‘讀書記·中庸序’>라 하여, 주자를 끝없이 진실을 찾아가는 추구과정의 열린 인물로 인식하는 상반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윤증(明齋 尹拯)은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주자를 절대시 하는 태도에 대해, “사실
을 살펴 보면 혹은 그 명목만 얻어서 그 참 뜻은 반드시 서로 같지 않는 것이 있
고, 혹은 먼저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주자의 말을 증거하여 거듭한 것이 있다. 그
심한 것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 있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두 겉으로는 반대하지 못하나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았다”<.明齋遺稿., 別集권3,
‘擬與懷川書’>고 언급하였다. 곧 송시열이 주자학을 표방하면서 사람의 독자적 견해를 억압하려드는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여, 마치 패자(覇者)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는 것’(挾天子以令諸侯)처럼, 도학자가 ‘주자를 끼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挾朱子以箝衆)임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성호학파를 열었던 실학자 이익(星湖 李瀷)은 18세기 전반기에 당시 도학이념의
유교가 이미 생명을 잃었다고 진단하기도 하였다. 곧 그는 제자 권철신(權哲身)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사람을 대하여 일찍이 유교의 도리로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이익됨이 없기 때문이다”<.星湖全書., 권30, ‘答權旣明’>고 하여, 당시 조선사회에서 도학은 극심한 당쟁의 갈등을 해소하거나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는 문제해결의 역량을 잃고 관념적 명분논쟁이나 형식적 의례절차에만 집착하여, 조선사회에서 이미 유교의 생명이 끝났음을 선고하였던 것이다.
또한 18세기 후반에 활동하던 북학파의 실학자 홍대용(湛軒 洪大容)은 새로운 실
학적 사유체계를 추구하는 지식인(實翁)의 입을 통해 공허한 도학자(虛子)의 고착되고 형식화된 사유의 허위성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곧 “정학(正學)을 붙들어 세운다는 것은 사실상 자랑하는 마음(矜心)에 말미암고, 사설(邪說)을 물리친다는 것은 사실상 이기려는 마음(勝心)에 말미암으며, 세상을 구제하는 인(仁)이란 사실상 권력을 잡으려는 마음(權心)에 말미암고, 자신을 보전하는 지혜란 사실상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利心)에 말미암는다”<.湛軒書., 內集권4, ‘.山問答’>고 하여, 유학자들이 허위에 빠져 ‘도(道)’의 참뜻은 사라지고 세상이 허망하게 되었다는 도학의 사상적 타락현실을 고발하였던 것이다.
배타적· 독선적 도학 - 주자학은 조선사회에서 지배이념으로서의 지위와 세력을 유 지해갔지만, 어떤 다른 사상도 포용하지 못하는 경직성에 빠지면서 시대변화에 적
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도학 - 주자학의 이념은 활력을 잃은 채 형식적인 관습과 허위적인 관념에 매달려 있다가 자멸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독선적 종교는 한 시대에 아무리 강성하더라도 결국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선시대의 지배이념이었던 도학 - 주자학의 경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과 충돌
 18세기의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지배이념인 도학 - 주자학에 대한 도전이 안팎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양명학의 대두와 실학의 확산이 유교 안에서 도학의 시대적 한계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서학 - 천주교의 유입은 밖으로부터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문을 열도록 요구하는 도전이었다.

18세기 중반과 후반에서 성호학파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학에 대한 인식은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익은 서학의 자연과학지식에 적극적 관심과 수용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천주교 신앙내용에 대해서는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익 문하의 성호학파 안에서 보수적 경향의 공서파(攻西派: 愼後聃· 安鼎福등) 인물들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거부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지만 서양과학지식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며, 진보적 경향의 신서파(信西派: 李家煥· 權哲身· 李檗·丁若鏞 등) 인물들은 서양과학에 대한 실용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점차 천주교 신앙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수용으로 나아가는 상반된 방향을 보여주었다.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오면서 성호학파의 신서파
청년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성립되었다.

당시 천주교 공동체는 선교사들이 전파한 것이 아니라 유교 지식인들이 교리서를 읽고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성립한 자생적 교회라는 점이 중시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된다.
하나는 천주교 교리서가 지닌 성격이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서양선
교사들이 한문으로 간행한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은 천주교 교리를 유교경전의 가 르침과 일치시켜 해석하는 이른바 보유론(補儒論)의 적응주의 입장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정통주의적 도학자들은 천주교신앙 집단이 표면에 등장하자 전면적 배척 태도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개방적 수용태도를 지닌 실학자들 가운데는 유교적 사유와 연결된 보유론적 천주교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유교사회인 중국과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의 전파가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독선적 대립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회선교사들이 보여준 포용적 소통의 논리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 하나는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인 것은 성호학파의 신서파 청년층 유학자들로
서, 이들은 도학적 사회체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개혁방향을 모색하고 있
었기 때문에 능동적으로 서양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들은 서양과학기술을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이면서, 서양과학지식과 연결되어 있는 천주교 교리에도 긍정적 이해를 심화시켜가다가 천주교 신앙의 수용으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주교 선교사 쪽의 사정을 보면,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천주교 교단들
에는 적응주의 입장을 지키는 예수회에 맞서서 천주교의 순수성을 요구하는 독선적 입장의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 등이 유교전통의 제사를 인정할 것인지 부정할 것인지의 문제로 대립하여 ‘의례(儀禮)논쟁’을 일으켰었다. 교황청이 최종적으로 내린 제사금지령으로 예수회의 포용적 입장이 패배하고 다른 교단의 독선적 입장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렇게 귀결된 배경에는 18세기에 들어오자 정치적으로 서양의 우월주의가 팽배하면서 선교정책도 기독교우월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요, 따라서 현지의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적응주의 선교정책이 설 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사회의 유교 지식인들을 보면, 서양과학과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성호
학파 신서파의 개방적 입장은 한줌도 안되는 극소수였고, 절대다수인 도학자들의
강경한 배타적 거부의 벽에 부딪쳤다. 따라서 천주교 신앙은 유교 지식인 속으로 파 급될 통로를 찾지 못하고, 중인층 내지 서민층 속으로 내려갔던 것이 현실이다.

한 북경교회로부터 제사 금지령이 전달되자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廢祭焚主)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유교적 교화체제에 역행하는 반인륜적 사교(邪敎)집단으로 규정하여 금교령(禁敎令)을 내렸다. 그 결과로 신서파에서도 중심인물의 다수가 이탈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천주교 신앙은 1880년대 신앙의 자유가 공인될 때까지 조선사회 안에서 지하교회로 활동하였고, 유교지식인이 아니라 서민층이 신앙공동체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에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교리서와 개방적 유교 지식인이 만
나서 형성하였던 유교· 천주교 사이의 조화구조가 무너지고 말았으며, 유교· 천주교의 조화구조가 형성할 수 있던 새로운 사상과 종교문화의 가능성도 좌절되고 말았다.

그 대신에 유교전통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서양중심적이고 독선적 입장과 유교체제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서민층들이 만나 천주교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옥(邪獄) - 순교(殉敎)’가 반복되는 충돌로 유교와 천주교의 대립구조가 고착되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선적 도학이념과 독선적 천주교신앙이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벌어졌던 첨예한 쟁점들은 크게 4가지 주제로 집약시켜 볼 수 있다.

 

교리의 기본적 견해와 관련하여서는

① 우선 천주교의 영혼불멸론과 사후세계로서 천당지옥설이 쟁점의 초점이었으며, ② 이와 더불어 ‘천주(天主)’의 존재가 도학의 ‘태극’(太極)이나 '리’(理)와 구별된다

   는 견해가 비판의 초점이 되었다. 천주교교단의 활동과 관련하 여서는

③ 먼저 천주교에서 유교의 조상제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④ 또 하나는 천주교 교단이 서양의 무력침략세력과 연결되어 국가의 안전을 위협

   한다는 인식이다.

 

                  4. 한국종교의 시대적 역할과 자기성찰
 어떤 종교도 한 시대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 종교가
번뇌에 빠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혼란에 빠진 사회를 구출하는 순기능이 있는
가 하면,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면서 복을 팔아 교단의 재산을 증식시키고 사회적
모순에 편승하여 교단의 세력을 유지하는 등 역기능도 크다.

독선에 빠진 종교는 그 스스로 병들고 사회적 기능도 역기능으로 작용하지만, 이와 반대로 자기 성찰에 과감한 종교는 그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며 사회적 기능도 순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의 종교의식을 지배하던 불교의 교세는 극성하였는데, 교단과 승려의
타락이 심하여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무거운 짐이 되었을 때, 불교를 억압하고
새로운 이념으로서 도학 - 주자학의 유교를 통치원리로 삼는 조선왕조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도학이념의 유교가 지닌 독선적 정통론이 불교를 억압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불교 내부가 타락과 부패로 병들었던 사실이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도 있다.
선조 때 서산(西山休靜)대사는 불교교단의 타락상에 대한 반성에 과감하였고 국
가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책임을 감당하면서 사실상 유교사회 안에서 불교의 안정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정은 삼교가 대립하는 현실인식과 대립 해소의 문제를 종파적 입장에서 벗어나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나는 삼교의 무리들이 각각 다른 견해에 집착하여 서로 만나려들지 않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래서 이 제 삼교의 문호를 조금 열어 통하게 하려할 뿐이다. 아! 삼교를 통칭하면 ‘도’라 한다. ‘도’란 무엇인가? 철저히 궁구해 보면 바야흐로 ‘유교’도, ‘불교’도, ‘도교’도 모두 헛된 명목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三家龜鑑.(한불전[7], 634)>라고 하였다. 종교의 대립현상은 각 종교의 자기중심적 집착 곧 종파적 이기주의에 근원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종교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종파적 이기심을 깨뜨리고 넘어서서 진리(道)의 근원을 밝혀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종파적 독선과 이기심에서 벗어나 열린 눈으로 진리를 보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종파란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모두 헛된 명목의 껍질일 뿐이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 은 독선적인 종파주의의 미성숙한 시야에서 벗어나, 각 종파가 하나의 근원적 진리를 지향하는 여러 가지 통로의 하나일 뿐이라 각성하는 열린 눈의 성숙한 시야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바로 이 점에서 휴정은 불교를 변호하는 호교론(護敎論)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 스스로에 대한 반성의 자성론(自省論)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곧 그는 “어 찌하여 도적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팔아먹으며 여러 가지 업(業)을 짓느
냐”라고 한 .능엄경.(楞嚴經)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승려가 타락하면 부처를 해치
는 도적이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것은 승려만이 아니라 어떤 종교의 성직자
들도 그 본래 정신을 잃으면 교조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고 마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격언이다.
도학은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조선초기의 도학자들은 타락
한 세속권력에 저항하다가 몇 차례 거듭된 사화(士禍)를 통해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다. 그것은 유교이념을 표방한 사회에서 유교이념을 실현하고자 투쟁하다가 희생된 순교(殉敎: 殉道)의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말부터 도학의 선비들이 정치를 담당하면서 이른바 ‘사림정치’(士林政治)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도학의 선비들이 배타적 독선과 당파적 이기심에 빠져 분열하여 당쟁을 벌였으니, 도학이 전성하던 바로 그 시기에 도학의 쇠퇴와 선비들의 타락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당쟁의 과정에서 도학자들은 끊임없이 도학이념을 명분으로 내세워 당파적 대립을 계속하였지만, 결국 조선사회의 분열과 국가의 쇠망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영조는 당파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태학(太學)에 탕평비(蕩平碑)를 세워서 선
비들에게 경계하고, ‘탕평’정책을 추진하였지만, 당파에 빠진 도학자들은 군왕의 간곡한 호소나 국가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도 도학이념을 끌어들여 자기 당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을 찾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도학자들이 독선과 이기심에 빠져 당파적 분열을 일삼고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우기만 할 뿐 스스로 자신의 과오를 성찰하지 못하면서, 조선후기의 도학은 대중의 교화를 위한 기능도 상실하고 국가의 안위를 염려하는 충성심도 허상이 되고 말았으며, 조선사회를 이끌어 가던 지도기능을 상실하고 도리어 사회에 부담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학자들이 정통의식에 따라 천주교에 대해 엄격한 배척과 억압을 요구하였을 때, 정조는 “무릇 좌도(左道)를 끼고 민중을 미혹시키는 것이 어찌 서학(西學) 뿐이
겠는가. 중국에는 육학(陸學)· 왕학(王學)· 불도(佛道)· 노도(老道)의 유파가 있지만 어찌 일찍이 금지했던 일이 있는가. 그 근본을 따지면 오로지 유생(儒生)이 독서하지 않은 결과에 말미암은 것이다”<.正宗實錄., 12年8月壬辰>라고 하여, 천주교 배척에 앞서 유교의 학풍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것은 유교사회에서 천주교의 신앙운동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군왕 자신이 그 원인을 분석하면서 유교정신의 쇠퇴를 지적하였던 반성적 비판이요, 유교현실에 대한 솔직한 자기성찰이다.
사실상 조선 후기에 정통이념으로서 도학이 누리고 있던 사회적 권위에 비하여 도
학이념의 사회체제는 관료의 부패와 민생의 궁핍 및 제도적 모순에서 헤어날 수 없
었다.
조선초기에는 도학이념이 불교를 개혁대상으로 삼았지만, 조선후기에는 도학이
개혁대상으로 위치가 뒤집어졌던 것이다. 도학이념 체제의 사회적 폐단과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조선후기 실학이 등장하였지만, 절대다수의 도학이 구축해놓은 견고한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도학체제의 붕괴국면에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다. 한편으로 외래종교로서 18세기 말에 자리잡기 시작한 천주교와 19세기 말에 전래하기 시작한 개신교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자생종교로서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신종교 및 민족종교가 출현하여 도학체제의 조선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보면, 우선 천주교는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조선사회의
예교(禮敎)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윤지충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땅에 묻은 이유를 밝히면서, “사대부집안의 목주(木主: 神主)는 천주교에서 금지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기를 원치 않는
다”<.正宗實錄., ‘15年11月戊寅>라고 대답하였다.

육신의 부모 위에 있는 ‘대부모’ 인 천주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임금의 위에 있는 ‘대군주’로서 천주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주교의 규범이 유교적 사회체제의 국법에 어긋날 때에는 국법을 어기고 천주교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확신을 밝히고 있으니,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가정이나 국가와는 언제든지 충돌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천주교는 전래초기에 예수회가 서양과학기술을 천주교 교리와 함께 소개함으로
써, 중국의 선교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양과학기술의 수용은 유교전통사회의 낡
은 세계관을 변혁시켜주고 생산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지만, 조선사회에 전파된 천주교는 종교적 신념만 강화하고 기술문명의 전수에는 관심의 문을 닫았다.

당시 천주교의 선교단체는 이미 예수회가 아니었고, 또 선교정책도 유교사회를 존중하여 이에 적응을 추구하는 입장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천주교는 현실사회의 개혁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세(來世)에서 개인적 구원을 강조 하는데 기울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층민을 신분적 억압으로부터 해소시켜주고, 축첩제도의 폐단을 개선하는 등 일정한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천주교는 서양종교로서 조선사회의 전통과 이질적 성격이 강한 신앙공동체를 유지해 갔던 것이 사실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서양선교사들이 서양세력을 등에 업고 활동하였던 점에서 천주
교와 다를 바 없다.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급격히 붕괴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사회
체제의 보호 밖으로 밀려난 서북지역 대중들 속으로 신속히 파고들어 교세가 빠르
게 성장하였다.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의료활동으로 대중의 생활을 보호하고, 교육활동으로 새로운 근대지식을 받아들이는 통로를 열어주었으며, 음주와 도박과 사술(邪術) 등으로 황폐화된 사회풍조에 맞서서 풍속을 바로잡아주면서, 조선왕조의 체제 붕괴로 방황하던 대중은 물론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다수 개신교에 들어갔다. 조선왕조의 붕괴와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 사회적·정신적 공황기에 개신교가 대중의 신앙적 요구에 부응하고 사회적 희망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천주교 보다 백년 늦게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훨씬 더 큰 교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천주교나 개신교가 조선사회의 쇠퇴와 붕괴과정에서 대중 속에 자리를 잡고 성
장하면서 서양의 정치·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새로운 시대의 조류를 대표하였던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교전통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유교전통에 상반하는 서구적
근대질서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우리의 역사적·문화적 기반과는 이질적인 서구적 가치질서를 우월한 것으로 요구하면서, 기독교는 우리사회의 역사적 뿌리와 연결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의 요구와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붕괴과정에 서양종교로서 천주교나 개신교가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전통질서의 내부적 개혁과 민족의식의 각성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상응하여 발생하였던 것이 신종교 내지 민족종교의 등장이다. 중국에 예속된 도학의 사대주의적 ‘존화론’(尊華論)에서 벗어나며 동시에 서양문화에 의존하는 기독교의 이질적 분위기에도 벗어나는 독자적 노선을 찾아갔던 것이다. 

                                    5. 유교 속의 포용논리
 종교조직은 다른 종교와 교세의 경쟁에 빠져들면서 서로 비난하거나 부정하려들고 심하면 다른 종교를 파괴하려드는 집단적 이기심이나 배타적 공격성이 매우 강하다. 그 뿐만 아니라 한 종교가 궁극적 존재의 인식에서나 교리체계의 진실성에 대 한 독단적 신념을 제시하는 순간에 이미 다른 종교의 신념을 용납하지 못하고 적대
적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종교간의 대립과 갈등은 종교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 독선의 미성숙함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와 종교의 만남에서 대립과 갈등을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그만큼 그 종교의 교단이나 사회체제가 성숙한 단계에 올라와 있음을 의미한다. 유교는 정통성을 중시하는 독단적 사유와 더불어 다양성의 조화를 존중하는 포용적 사유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공자는 “군자는 조화를 이루지만 동조하지 않고, 소인은 동조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논어., 子路>)고 말하여, 지조없이 영합하여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소신을 지키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열린 자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서로 다른 맛이 어울려 국맛을 내듯이, 서로 다른 소리가 어울려 아름다운 음악을 이루듯이, 서로 다른 주장이 어울려야 화평한 정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획일화된 추종(同)이 아니라 다양성의 화합(和)이 진실한 것임을 강조하여 ‘조화’를 가치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도학자들은 명분과 의리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엄격하게 배척하였지
만, 배타적 논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 포용적 논리도 간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
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가 분열되는 상황에서 양쪽을 조정하려 노력하고 있었던 율
곡에게 어떤 사람이 “천하에는 양쪽 다 옳거나 양쪽 다 그른 경우는 없다”고 항의
하자, 이때 율곡은 “천하에는 진실로 양쪽 다 옳거나 양쪽 다 그른 경우가 있다”<.
栗谷全書., 권34, ‘年譜下’>고 하여, 무왕(武王)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경우처럼 대립된 입장의 양쪽이 모두 옳은 경우를 들면서, 양시양비(兩是兩非)의 화해논리를 제시하였던 일이 있다.
실학자 정약용은 “성인의 도리는 구애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며 의(義)를 따른다.
그러므로 ‘시중’(時中)이라 한다. 그러나 그 속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의리 도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다. … 양주와 묵적은 모두 현인이다”<.與猶堂全書.[2],
권5, ‘孟子要義’>라고 하여, 맹자 이후 유교전통에서 이단의 대표적 유형으로 규정한 양주의 위아설(爲我說)이나 묵적의 겸애설(兼愛說)에 대해서도 한쪽에 집착하는 폐단을 경계할 뿐이지 그 주장은 유교의 도리 속에 포용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곧 ‘이단’이란 한쪽 극단에 치우친 것이므로 ‘중용’ 속에 포용할 수 있다고 보거나, 양주와 묵적을 ‘도’ 속에 포용할 수 있다는 논리는 확장시켜보면 진정한 ‘도’는 어떤 이질적 종교나 사상도 포용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능하게 한다.
18세기 후반 천주교의 초기 전래 과정에서 천주교를 수용하였던 성호학파 신서파
의 유교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대부분 유교체제에서 벗어나 천주교 신앙으로 빠져들거나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고 유교체제로 돌아왔던 사실은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포용과 조화가 어려웠던 현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약용은 20대의 청년시절 천주교 신앙에 빠져들었다가 30대 초반에 공식적으로 천주교 신앙에서 벗어났음을 밝혔던 인물이지만, 그의 방대하고 창의적인 유교경전 해석에서는 천주교 신앙의 빛으로 유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정약용이 천주교 교리의 영향을 받아들여 유교· 천주교의 조화 가능성을 열어주면
서 유교경전을 새롭게 해석하였던 대목을 네가지 점으로 짚어볼 수 있다.

① 먼저 '천(天)-상제(上帝)’의 존재에 대해, 주자학에서 ‘리’(理)라 규정한 형이상학적 인식에서 벗어나, 지각능력을 지니고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는 주재자로서 인격신적 존재로 재발견하였다.

② 또한 인간은 ‘천-상제’가 항상 내려와 감시하는 앞에 홀로 마주선 ‘신독’(愼獨)의 자리를 각성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거짓없는 진실함(誠)으로 섬기는 신앙적 자세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섬겨야 한다’(實心事天)는 사천학(事天學)의 경학세계를 열어주었으며, 그것은 하늘을 섬기는 (事天) 신앙적 세계와 부모를 섬기는(事親) 인륜적 세계를 일관시킴으로써, 신앙에 기반하는 도덕질서를 제시하는 것이다.

③ 이와 더불어 인간은 ‘천-상제’가 내리는 명령과 경고를 도심(道心)에서 들을 수 있음을 확인하여, 인간의 도심이 바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 곳이라 강조함으로써, 상제와 인간의 생생한 인격적 만남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천-상제’의 명령(天命)이 인간에게 주어진 ‘성’(性)은 인간의 마음이 선(善)을 좋아하는 기호(嗜好)라 해석하여 주자학에서 ‘성’을 ‘리’라 보는 본체론적 해석에서 벗어났다. 이에 따라 인간의 선과 도덕은 인간의 본질로 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기호에 따라 인간이 실천하여 이루는 성과라 하여 인간 의지의 자율성과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새로운 인간관을 열어주었다.

④ 나아가 정약용은 '천-상제’와 인간을 마주 서게 하고, 물질적 존재에는 어떠한 신성(神性)도 부여하지 않으며, 주자학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깨뜨리고 '기’(氣)도 물질의 한 양상일 뿐이라 보고 ‘리’도 물질에 의지한 법칙일 뿐이라 하여 이기설(理氣說)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경험과학적 사유기반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정약용의 경학은 유교와 천주교의 세계관을 조화시켜 재해석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유교경전을 천주교교리에 일치시킨 것이 아니다. 곧 그의 경학은 천주
교 교리의 수용을 통해 주자학적 틀에서 벗어나 유교경전 속에 잠재되었던 신앙적
세계를 깨워냄으로써, 유교사상을 얼마나 신선하고 풍요롭게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지를 가장 잘 드러내 주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질적 사상의 수용이 전
통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위기의식과 방어논리를 내세웠던 보수적 도학자가 사실상유교정신의 시대적 변화를 가로막아 파멸의 길을 자초하였던 반면에, 도리어 기독
교사상의 수용이 시대변화 속에 유교사상의 적용가능성을 열어주는 의미있는 길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6. 자성(自省)과 화합(和合)의 종교에 대한 희망
 오늘날 한국사회의 종교적 분포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가 서구적 현대 질서를 배경으로 하나의 축을 이루고, 불교가 전통종교로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며, 전통종교로서 유교나 신종교들은 군소세력으로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다종교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해방이후 서구중심적 정치역학과 서구지향적 가치질서 속에서 기독교가 급팽창하였고, 이에 비해 유교는 전근대적 전통질서로서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다.

사실 조선시대에 시대정신의 기준으로 독선적 권위를 누리던 유교의 역할을 오늘에는 기독교가 대신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유독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렇게 폭발적 성장 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가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배를 받아야 하는 역사적 파국에 따른 정신적 공황을 겪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한국근대사회에서 전통종교가 망국과 식민지배, 민족분단, 민주화, 근대화 등 역사의 격동 속에 혼돈에 빠진 대중을 구제할 수 없었을 때 기독교가 그 공백을 쉽게 파고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안정적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종교적 상황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현대 한국사회가 서구지향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시대정신
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오늘에 와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고 있다.
서양에서도 이제 기독교가 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서양의 압도적 영향력도 줄어들 면서 그 반면에 중국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는 국제질서 속에서 방향감각이 조정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봉건적 전근대적인 것으로 부정하는 가치관에서 자주성과 고유성의 요구에 따라 전통의 재발견이 탐색되면서 정신문화 적 새로운 각성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기독교가 서양에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라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고, 유교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기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매우 감소되었다. 문제는 오늘의 현재에 기독교와 유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지 물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시대에 도학전통의 유교가 배타적 독선에 빠졌다가 스스로 무너졌는데, 오
늘의 기독교는 독선에 빠져있고 엄청나게 팽창한 교세에 사로잡혀 유교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종교는 교세의 팽창과 사회적 영향력을 누리는데 안주하는 순간부터 스스로 붕괴의 길에 접어드는 것이다. 대중과 사회를 향해 가르침을 베푸는 목소리만큼이나 종교교단 자체의 불의와 비리에 대한 뼈아픈 성찰의 목소리가 들려야 하지만, 어디에도 서산대사처럼 “어찌하여 도적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팔아먹느냐”고 교단을 꾸짖는 성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스로 성찰할 수 없는 종교는 독선에 더욱 깊이 빠지고 거대한 성전(聖殿)과 성상(聖像)을 세우는 경쟁 속에 속으로 병이 깊어져 갈 뿐이다.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종교는 사회에 희망을 열어주거나 지도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사회의 모순과 함께 흘러가다가 좌초할 운명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종교가 스스로 성찰 할 수 있으면 독선과 대립의식에서 벗어나 다른 종교를 향해 열린 자세를 지니게 되고 종교 사이의 상호 이해와 조화의 길을 열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천주교나 개신교 안에서 토착화의 시도나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시도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대세에 파묻히는 소수의 희미한 목소리일 뿐이다.
한국에서 유교의 현실은 스스로 붕괴되고 사회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기 개혁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외래사상을 수용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전통 속에서 사상적 생명력을 되살려내어 왔다.

앞으로 중국이 사회주의 이후를 위한 정신적 기반을 유교전통에서 재발견한다면 유교이념의 새로운 체계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19세기말 근대화과정에서 강유위의 공양학(公羊學)에 기초한 ‘대동’(大同)사상은 비록 실패하고 말았지만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켰던 유교 근대화의 시도였다.

가까운 장래에 중국에서 새로운 유교 개혁론이 등장하여 확산된다면 한국사회에도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유교는 이미 죽은 종교이거나 흔적이 지워져가는 전통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잠재의식 속에 아직도 살아있고, 지표면 아래에 뿌리가 살아있다고 본다면 다시 봄을 맞게 되었을 때 새로운 면모로 되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 있다.

유교적 순환사관(循環史觀)에서는 "회복됨에서 천지의 마음을 본다”(復, 其見天地之心乎.<.주역., 복괘>)고 하였다.
한자문화권 내지 유교문화권의 정신문화적 사회적 기반은 지난 백여 년간 서구지
향적 근대화로 결코 완전히 대체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시대적 변화 속에
유교문화권의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하게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낡은 시대의 종 교로서 동양적 전제군주시대의 독선적 유교나 서양제국주의 독선적 기독교는 더 이상 새로운 시대의 종교로서 할 수 있는 기능도 역할도 없을 것이다.

인간 위에 군림하고, 과학지식이나 도덕규범 및 법질서와 충돌하며, 다른 종교와 갈등하는 독선적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대립의 논리가 아니라 조화의 논리로 화합을 이끌어가며, 종교가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악과 과오를 끊임없이 성찰할 수 있 는 성숙한 종교가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래의 한국에서는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가 조화를 이룬 종교의 질서가 올 것으로 기대된다. 종교는 사회를 구원하지 못해도 사회가 종교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이 종교를 선하게 하는 것이지, 종교의 선이 인간을 선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공자도 “인간이 진리를 넓힐 수 있지, 진리가 인간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논어., 衛靈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토 론 문)
- 발표자: 금장태(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참석자: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철학과 교수)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 
백승주, 미래전략연구원 평화통일전략 센터장(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이혜정, 미래전략연구원 외교안보전략 센터장(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명철, 미래전략연구원 연구위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 
추장민, 미래전략연구원 과학기술전략 센터장(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 

허   은, 미래전략연구원 연구위원(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김형찬: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조선 후기 유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역사적 과정
을 짚어 주시고 그 만남의 중심에 있었던 정약용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
셨습니다. 정약용은 비록 천주교를 배교하였지만, 천주교의 눈으로 유교를 바라보면서 기독교 정신을 우리 문화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정약용은 철저하게 유교 정신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기독교와 유교를 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기독교(문화)와 유교(문화)의 교점과 충돌점이 어느 지점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도 같은 고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그러한 고민을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금장태: 정약용의 고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 그 문제의식을 더 심화시킬 수 있습
니다. 1970년대 초, 어느 학술회의에서 정약용의 서학문제에 관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정약용과 천주교를 연결해서 발표했는데,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학자들은 ‘정약용은 엄연히 유학자인데 왜 천주교와 결부시키는가? 정약용의 어느 구절에서 천주교를 인용한 게 있는가?’라는 비판을 하였습니다. 반대로 당시에 천주교인들을 만나서 정약용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정약용은 배교자다’라는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주교가 그대로 조선에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천관(天觀)의 인식은 천주교의 천주(天主)개념과 유교의 상제(上帝)개념 사이에 매우 다양한 이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자와 마테오 리치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입장에서 설명하는 형식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서로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방식인 겁니다.

이에 반해, 정약용은 기독교와 유교를 충돌하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눈으로 유교경전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쉬운 예로 비유하면, 같은 무대 위에서 조명이 다른 부분을 비추기 시작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경전을 지금까지의 이해와 다른 새로운 의미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요약하면 유교경전을 기독교 세계와 아주 쉽게 통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정약용은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하면, 그의 학문체계는 북학(北學), 이학(理學), 실학
(實學) 등과 달리 어떤 특정한 명칭으로 명명을 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정약용이 수사학(洙泗學)의 관점에서 유교경전을 바라보았다고 주장하지만, 정약용은 그 시대에서 자신의 눈으로 수사학의 관점을 빌어 유교경전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약용은 그 시대에서 유교경전을 기독교적인세계관과 서로 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고 볼 수 있죠.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들 사이에 의사소통의 통로를 열어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정약용의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유교와 불교, 천주교와 불교 사이의 의사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테오 리치는 유교가 중국의 현실세력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유교에 대해서는 적응주의 정책을 썼고 반대로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지만 중국에서는 불교와 천주교 사이의 논쟁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만일 이러한 논쟁이 발생하여 특정한 시야에서 상대방과 소통 할 수 있는 논리를 필요로 한다면, 정약용의 기독교와 유교의 교점을 찾는 논리는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포용론, 소통론, 대화론과 같은 위치를 차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약용의 이러한 논리를 좀 더 일반화시킨 경우가 그의 중용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맹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중용을 해석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약용이 맹자를 잘못 읽었다고 하지만 그는 맹자를 좀 다르게 읽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맹자는 “양주(楊朱), 묵적(墨翟)을 무부(無父), 무군(無君)이다”라고 단호하게 배척했습니다. 반면에 정약용은 “성인의 도리에는 양주나 묵적이 다 들어있다” 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독선기신’(獨善其身)과 같이 자기중심의 관심으로서 ‘위아’ (爲我)나, ‘겸선천하’(兼善天下)와 같이 세상을 위한 보편적인 사랑으로서 ‘겸애’(兼愛), 곧 양주나 묵적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말이죠.

정약용은 “도(道)라는 것은 ‘위아’와 ‘겸애’를 다 포용하는 게 중용의 도(道)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약용은 한쪽 극단에 매달려서 다른 견해를 포용할 수 없는 사유(思惟)는 잘라내야 한다고 말 합니다. 쉽게 말해 양주와 묵적의 견해를 잘라내자는 게 아니라 양주나 묵적의 주장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유와 소통하지 못하는 견해를 잘라내자는 뜻이죠.

정약용은 소통 못하는 사유가 ‘이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정약용의 포용 논리는 유교와 천주교의 관계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지만 일반론으로서 포용 논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약용의 논리가 어떤 면에서는 종교 간의 대화의 문제, 갈등 구조에서 소통의 논리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김형찬: 정약용은 기독교와 유교의 갈등과 충돌의 문제를 깊이 생각을 하고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 20세기 무렵 기독교와 유교의 갈등과 충돌은 우리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
시아에서도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정약용과 같은 고민이나 해결방안 제시, 학문적 성과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금장태: 일본의 경우는 서양의 과학문물을 도입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최한기의
경우와 같다고 볼 수 있죠. 정약용이 경학자였다면 최한기는 서양과학을 도입해서
그것을 유교전통의 기철학 체계 속에서 재구축하려고 했습니다. 최한기 같은 인물
들은 당시 일본에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중국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
니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서 정약용의 경우와 유사한 시도를 한 인물은 제가
본 자료의 범위에서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서양 선교사 중에서 정약용과 유사한 시도를 했던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
다. 서양 선교사들 중에는 .천유인.(天儒印) 곧 천주교와 유교는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똑같다는 입장에서 저술을 하여 유교와 천주교를 소통하는 논리를 선교방식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저술은 사서 한 구절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각각의 구절이 천주교의 어떤 교리에 해당되는지를 말할 정도로 서로를 일치시키려고 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이렇듯 유교와 천주교의 융합을 주장한 당시 선교사 가운 데에는 마테오 리치의 입장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경우는 성리학과는 단절하고 유교 경전과 소통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 가운데는 천주교를 성리학적인 사유와도 연결시키려 시도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양 선교사의 선교활동 영향 아래 있었던 몇몇 중국의 유교 지식인들이 그 시기에 소통론으로 글을 썼지만 경전을 체계적으로 해석한 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약용은 동아시아 사상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김형찬: 그러한 소통의 맥락에서 현재 중국의 부상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서구를 따라가려고 하면서, 한편
으로는 자국의 문화적인 자존심을 세우고, 확산시키겠다는 의도로 전 세계에 공자
센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를 종교ㆍ문화 간의 소통의 측면에서 보면, 중국은 기독 교와 잘 화합해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 아닌 단순히 공자를 내세워서 유교문화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소통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금장태: 아마도 중국은 유교문화를 사회주의와 연결해서 새롭게 해석할 것입니다.
통속적으로 유교를 사회주의와 결합시킨 경우를 북한에서 볼 수 있고, 유교를 기독
교와 결합시킨 경우를 통일교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중국은 거대한 인력을 이용해서 유교의 사회주의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위한 작업을 할 것이고, 북한보다는 훨씬 더 세련되고 새롭게 해석할 것입니다. 그 작업이 완료된 이후에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인 ‘중화주의’는 더욱 강화되겠죠. 그리고 공자센터 건립이 갖는 의미는 중국이 자기 영향력 속에서 다른 사회를 거두어들이려는 포교의 태도이지 자기를 변화시켜서 외부에 적응하여 소통하고자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라 보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중국이 유교에 대한 재해석을 하더라도 포용적인 이론을 충분히 계발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정약용의 모델이 유교와 기독교 사이나 유교와 타종교 사이의 교류를 위한 열린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장민: 저도 같은 부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중국이 갖고 있는 소통의 문제점이
그것입니다. 사실, 중국은 사회주의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성장을 해왔습니다. 그리
고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을 갖고 동시에 미국, 서구와 다른 형태의 중
국을 내세우려는 - 중국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포용이 아닌 대립하는 형태로 -  목적으로 공자 이념을 자신의 통치이념으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에 공자센터를 건립하는 것도 바로 그 차원에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공자센터 건립은 인류사회의 평화와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 간의 파열음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이러한 행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이 부분에서 정약용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 같습니다. 만일 정약용이 유교와 천주교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사상의 지평을 열었다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사상적 자산을 가지고 중국의 방식이 대립적이고 파괴적으로 가지 않도록 하는 논의의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그 역할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또는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중국이 과거 팽창주의 시절처럼 유치한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겠죠. 왜냐하
면 전 세계에 중국이 안 나간 곳이 없고, 엄청난 화교세력도 전부 수용을 해야 하
기 때문에 중국은 좀 더 세련된 명분과 논리를 제시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한편으로 서양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학자들과 비교적 활발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교 연구를 하는 중국인 학자들이 세계 곳곳에 많이 나가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들이 중국의 이론발전에 여과, 조정되어서 좀 더 세련된 논리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기본 의도는 팽창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단순하게 ‘중국을 따라오라’는 일방적인 방식은 잘 수용되지 않겠지만 여전히 중국은 정신적, 문화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팽창하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모두 다 거기에 넘어가서 중국의 문화적 아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중국은 거부감을 심하게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만의 세련된 통치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추장민: 세련됨 속에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독소들이 곳곳에 숨어있
을 가능성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은 악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중국이
그런 방식으로 통치이데올로기를 세련화한다면 그것은 21세기의 새로운 형태의 정 치철학이나 종교 간의 소통과 화해와 같은 형태는 아닐 것입니다.

현재 공자나 유교사상이 중국의 팽창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고 동시에 인류사회의 새로운 종교나 정치사상의 대안을 찾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활동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구해우: 말씀을 들으면서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의 근현대사 속에서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과 진행
과정을 평가하시면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조선이, 그 안에서도 정약용이 유교
와 기독교의 원리와 내용을 융합해서 유교를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키는데 기여를 했다는 평가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정약용의 새로운 유교 해석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같은 시대에 일본이나 청나라에서는 유교가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선 역시 소중화 사상에 휩쓸리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 었지만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내적인 차원에서 조선의 유교는 이론적으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약용은 이러한 유교의 이론적 발전을 토대로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을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면서 둘을 융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중국은 근대에 들어 와서 유교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 발전이 없는
상태에서 실용적인 영역에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다가 제국주의에 휩쓸려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중국은 유교 연구에 천착해서 동양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만남을 시도하기 보다는 자국의 신장된 경제, 국력에 기초해서 대외적인 차원에서 소프트파워를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공자는 그러한 차원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중국의 의도는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의도를 문화적인 차원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중국의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웅>(2002)이나 <황후화>(2006) 같은 영화와 2008년 북경 올림픽의 개폐막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영화를 보면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를 정당화시키거나 중화패권주의가 전체주의로까지 발전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북경올림픽의 개폐막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장예모 감독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중국 공산당의 통치이데올로기, 중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데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센터의 확산도 문화와 학문의 연계성 차원에서 볼 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이러한 의도에 대응해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문명과 유교 문명의 소통을 중요하게 취급한다면 우리는 정약용센터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중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중국은 구체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뒷받침하는 유교적 논리를 개발하고 그것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도 이 영향을 받겠죠.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독자적인 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그대로 중국에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경우에 구 교수께서 제시하는 대책방향은 중요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
시에 저는 좀 더 적극적으로 유교를 종교와의 관계, 사회 모든 분야와의 관계에서
재평가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교는 한국 경제 또는 법질서, 예술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만일 유교와 사회 여러 분야가 연결되는 부분에 대해서 한발 앞서 검토하고 개발하면서, 그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중국의 새로운 유교이론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중국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아 중국에 편입되면 한국은 또 다시 조선시대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겁니다.
조선의 개국 이후 몇 백 년이 지나서 한국 유학은 자기 스스로의 이론틀을 만들었
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는 중국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만들었죠. 그 독 자적인 노선이 다분히 주자학적인 조건에 고착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독자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중국의 새로운 이론에 따라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독창적인 영역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추장민: 최근 들어 각종 연구기관에서 인문학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중국을 연구
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그 연구과제들 중에는 “중국이 공자 사상을 세계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어떻
게 평가할 것인가?” 또는 “공자센터의 확장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라는 주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중화패권주의를 확산시키고 이데올로기를 수출하기 위한 중국의 의도를 분석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겠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중국의 공세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이에 대응하는 다분히 수세적인 차원의 접 근을 넘어서서 “한국에 우리의 유교 또는 유학이 있는가? 중국은 유교적 관점에서 현대를 재해석을 할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유교를 어떻게 재해석 할 것인가?”라는 보다 적극적인 입장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해우: 저는 우리가 중화주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 동양역사를
보는 눈을 바로 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동양사는 중국의 논 리 - 중국이 중심이고 오랑케가 주변에 위치한다 - 가 아니라 ‘남북문명’ 곧,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문명(황하문명)과 고조선, 고구려, 몽골까지 이어지는 북방문명이 공존해 왔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고 봅니다.

또 노자, 장자의 도교 사상이 아닌 우리 전통의 ‘선(仙)’사상, 풍류도에 대한 관심도 필요합니다. 사실 고조선이나 고구 려의 통치이데올로기는 선사상이었습니다. 물론 유교나 불교가 일부 영향을 주었지만 큰 줄기에서 바라보면 선사상이 우리의 전통사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사상이 꺾이기 시작했고 성리학이 국가지도이념으로 채택이 되면서 이와 연관해서 소중화주의가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에 의해서 소중화주의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소중화주의에 빠져들었던 역사를 갖고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사상사적 흐름 - 조선시대 이후를 중심으로 해석되는 경향 - 에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사를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전통사상까지 포괄시켜서 우리 사상사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중화주의에 휩쓸려가는 사상적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금장태: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화주의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 고 있습니다. 극명한 예로 조선말기 주자학자인 유인석(柳麟錫)의 묘비를 들 수 있
습니다. 그 분의 묘비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곧 ‘명나라 안의 조선국’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명’에 속한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1897년 고종의 황제등극은 우리가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유학자들 사이에는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으로 나눠졌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고종이 ‘황제’로 불리는 것에 반대하고, 국가 명칭인 ‘대한제국’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물론 우리 사상사의 기반을 고대사까지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중화의식이 우리 의식에 상당히 깊이 뿌리박혀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상사 안에 문화적, 정신적인 자주의식을 확보하는데 어떤 문제점과 함정이 있는지를 확실하게 해주는 작업이 좀 더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대한제국이 만들어지고 고종은 환구단(丘壇)을 만들어 황제 즉위식을 했습니 다. 환구단은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1913년
에 이 독립국가의 상징인 환구단을 헐어버리고, 거기에다가 철도호텔을 짓습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철도호텔을 헐고 더 크게 조선호텔을 짓습니다.

사실, 역사의식의 차원에서는 총독부를 헐어내는 것보다 환구단을 복원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조선시기도 문제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의식에도 문제가 상당히 심각합니다. 이러한 작은 부분들부터 확인해야 그에 따른 대책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과 우리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독자적인 자
기발언권을 어느 정도 확보해야 합니다. 만일 그대로 우리가 중국에 편입되면, 중국 변방국의 대접 밖에 못 받을 겁니다.


구해우: 사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같은 경우도 모두 다 독자적인 연호를 썼습
니다. 고려 때는 연호를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
서 연호를 포기하고 명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대한제국의
연호 사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장민: 유교는 학문 또는 사상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종교와 관련해서 유교를 살펴보면, 유교는 기독교, 불교와 달리 포교활동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지 않
았기 때문에 유교 경전이 성경이나 불교의 경전과 비슷한 위치를 갖는지에 대해서
도 의문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유교가 종교이고 종교로서 국민들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려고 한다면 유교 역시 기성종교의 포교활동과 같은 종교적 활동이 필
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장태: 그것은 정말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주장
에 대해서는 “유교는 종교다”라고 말하지만, “유교가 반드시 종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유교에는 종교가 아닌 측면도 얼마든지 있다”고 말할 겁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물과 기름이 분리되는 것처럼 명확하게 세속성과 신성성이 분리되고 있습니다. 반면, 유교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유교가 현실세계 속에 융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신성성의 경계가 흐릿한 유교가 훨씬 유연성이 높죠. 그리고 유교의 종교 문제에 대한 논쟁은 결국 유교인 스스로 유교적 신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와 같다고 봅니다.

유교의 종교성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 교토대학의 이케다 슈조(池田秀三) 교수는 일본에서 유교의 종교문제에 대한 논의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는 유교의 종교성과 관련된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검토하기만 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교는 종교성이 있지만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하다“라고 말 합니다.
한편 유교의 종교운동은 조선 후기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00년
대는 조선이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유교의 종교화 운동을 한 사
람 가운데 박은식(朴殷植)이 있습니다. 박은식은 대동교(大同敎)라는 교단을 만들었으며, 장지연(張志淵)도 거기에 참여를 합니다.

조선이 망하고 유교도 망하는 그 시대에 박은식은 “19세기, 20세기는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였지만 21세기, 22세기는 유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유교의 종교운동과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사람은 이병헌(李炳憲)입니다. 이 사람은 중국의 강유위(康有爲)를 다섯 번이나 찾아가서 직접 금문경학(今文經學)과 공교(孔敎)이론을 배우고 나서 강유위의 ‘공교운동’을 우리나라에서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철 학합일론.(宗敎哲學合一論)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19세기말 쯤이면 유교 지식인들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향상됩니다.

“기독교는 서양 과학, 서양철학과 충돌한다. 기독교는 비철학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러나 유교는 서양철학, 서양과학과 충돌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전 시대의 종 교이고 유교는 다음 시대의 주자(走者)다”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한편 종교는 고유성이 있어서 과학, 세속과는 다른 독자적인 신념체계를 갖고 있어
야 한다는 종교관도 있습니다. 이를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면 사회주의도 종교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를 책상에서 연구하는 사람에게 사회주의는 종교가 아닌 지식이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 거기에 생명을 거는 사람에게는 사회주의는 종교입니다. 종교는 신념이 살아 있을 때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과거 유학자들은 유교적 신념에 지조를 지키고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유교에 대한 신념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유교는 종교
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죠. 유교는 이미 종교의 생명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라
고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역사적으로 유교는 종교였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문제는 꺼진 불 속에서 불씨가 다시 살아나듯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는 유교가 오늘에 다시 살아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김형찬 : 오랜 시간 금장태 선생님과 기획위원들 간에 진지한 토론을 나눴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08/06 

내용 문의 : 미래전략연구원
http://www.kifs.org
주소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50-2 삼영빌딩 801 우)100-813

 

 

 

 

                               西洋의 눈에 비친 儒敎


                                           1. 서론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있으며, 각 문화권은 각 문화권 나름대로 자기 이외의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한 ‘관점’에는 주체가 객체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담겨 있으며, 나아가서 주체가 객체에게 미치고자 하는 영향력과 그에 대한 실천 전략이 숨겨져 있다. 오늘 우리는 16세기 동서항로 개통이래 20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이 자기 이외 지역의 문화를 바라본 ‘관점’과 ‘시각’을 특히 ‘유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서양인들이 견지해 왔던 ‘유교’에 대한 ‘관점’을 각 시기별로 분석함으로써 그들이 유교를 연구하고자 했던 의도와 동기는 무엇이었고, 그들이 유교문화권에 미치고자 했던 영향력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유교에 관한 담론이 발생할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의 좌표는 어느 지점이었는지 분석해 보기로 한다.

      2. 기독교 전교 시기(17세기초~18세기초) 서양인들의 유교관
 동양의 문화는 14세기경에 이미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동방견문록』을 통하여 단편적으로 전해진 바 있지만, 동서 항로가 개척된 후인 16세기부터 활발하게 서구에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7세기에 들면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전교를 위하여 동양의 역사?언어?문화를 연구하였으며 이들의 연구는 본국으로 보내는 정기적 보고서나 서간문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서양에 전해지게 되었다.

선교사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1-1610)는 기독교 전교를 위해 동양의 문화를 연구했으며, 그는 특히 유교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격의(格義)’하려는 ‘적응주의(accommodation)’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적응주의적 입장’은 이질적 문명에 대한 유교적 사대부들의 거부감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었다. 벨기에의 선교사 트리고(Nicholas Trigault, 1577-1628)는 마테오 릿치의 이탈리아어로 된 보고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보완하여 1615년에 『중국에 대한 기독교적 선교원정』이라는 제목으로 아우스부르그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책은 곧 불어, 독어, 스페인어로 번역돼 서양인들에게 널리 소개되었다. 이외에도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세메도(Alvare de Semedo, 1585-1658),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Martin Martini, 1614-1661), 로마출신 예수회 선교사 키르체(Athanasius Kircher, 1601-1680) 등의 동양 역사?문화?지리?언어에 관한 저술들은 17세기의 서양에 전래되어 동양 이해에 관한 입문서의 역할을 하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데카르트(1596-1650)의 『방법서설』이나 파스칼(1623-1662)의 『팡세』에서도 동양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지식은 하나의 유행이요 쟁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서가 서구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당시 서구사회를 지배하던 지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중세사회의 폐쇄적 신앙의 울타리를 넘어 이국적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을 때였다. 베이컨의 『신대서양』이나 캄파넬라의 『태양국가』와 같은 책들은 당시 서구 사회의 지적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 주는 동양의 역사는 구약에 근거한 서구문명사만을 역사의 전부라고 여겨오던 서구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이와 더불어 서구에서는 지구역사의 기원에 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교와 크리스트교의 융회(融會)’라는 화해적 입장에서 유교경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역경 작업’을 활발하게 수행하였다. 1687년 쿠플레(Philippe Couplet, 1624-1692) 신부는 기존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번역된『논어』『대학』『중용』에 ‘공자전(孔子傳)’과 ‘중국경서개론’을 덧붙여 『중국의 철인 공자』라는 제목으로 파리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유교경전과 동양문명에 대한 탐구작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테오 릿치이래 지속되어 온 유교사상에 대한 적응주의적 이해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다. 쿠플레 신부는 ‘서문’에서 이 책의 목적은 사람 낚는 어부(선교사)로 하여금 ‘보유론(補儒論)’이라는 미끼를 교묘하게 사용해서 중국인들을 그물 안으로 몰아넣는 일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또한 상인들(선교사)로 하여금 ‘보유론’이라는 선전술을 사용해서 이교도들을 설복시켜 기독교라는 상품을 구매하도록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전교에 일차적인 목표를 둔 탓으로 이들 선교사들의 경전번역은 ‘의도적 왜곡’을 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단적인 예로,『중국의 철인 공자』의 ‘공자전’에서 공자를 모세와 같은 기독교의 선지자로 묘사하고 있으며,『열자』의 ‘중니편’에 보이는 ‘西方有聖人’이라는 구절은 공자가 팔레스타인에서 예수가 태어날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17세기 예수회의 선교정책은 기본적으로 적응주의적 입장이었다. 즉 유교사상이 기독교의 교의와 충돌되지 않으며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선교사들은 비록 유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신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선교사들이 신유학을 거부하였던 이유는 독립존재로서의 ‘신’과 달리 ‘이(理)’는 물질(物)에 의부하여 존재하며, 인격자로서 신과 달리 ‘이’는 영적 감각을 가질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의 눈에 신유학은 기독교의 교의와 배치되는 무신론으로 비쳐졌다. ‘서양에서 온 공자’(西來孔子)라는 칭호를 받았던 줄레 알레니(Jules Aleni, 1582-1649)는『만물진원(萬物眞原)』에서 성리학의 ‘이’는 기독교의 ‘신’과 달리 사물을 창조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에서 ‘태극’이나 ‘이’는 사물에 내재한 법칙성에 불과하며 영각(靈覺)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안드레 로벨리(Andre -Jean Lobelli, 1610-1683)는 ‘태극’을 물질의 ‘원질’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선교사들이 원시유학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지만 신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서 우리는 그들의 유교 이해가 어디까지나 기독교 전교 목적에서 출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의와 조화될 수 있는 한에서만 동양의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려 했던 것이다.
마테오 릿치의 후임자였던 롱고바르디(Nicholas Longobardi, 1565-1655)는 신유학에 대한 실랄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중국인의 종교』에서 신유학의 ‘이’는 서양철학의 제1질료(material prima)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이에 근거하여 신유학을 유물론, 무신론이라고 비판하였다.

17세기 이래 유교사상의 서양 전파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예수회의 기득권에 도전하기 시작한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입장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예수회는 유교와 크리스트교의 조화를 모색하는 입장에서 유교의 문화 관습인 배천(拜天)?사공(祀孔)?숭조(崇祖, 祭祖)를 허용하였지만,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이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스페인 출신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생트 마리(Antonie de Sainte-Marie, 1602-1669)는 『중국의 선교』라는 저서에서 유교인들은 신을 모르는 무신론자?유물론자라고 하고, 그들의 사상은 자신들의 종교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유교사상과 제사의식의 해석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이른바 ‘전례논쟁’이라 불리며, 겉으로는 전교 노선의 차이처럼 보이는 ‘전례논쟁’의 배후에는 17세기 유럽 절대왕정(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의 해외무역 주도권을 둘러싼 헤게모니 다툼이 깔려 있다. 유교적 제사의식을 윤허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100년간에 걸쳐 벌어진 논쟁(1645-1742)의 최종 심판관은 로마 교황청이었다. 1699년 교황 인노센트 12세에 의하여 전례문제 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1704년에 클레멘트 11세에 의하여 유교식 전통 전례는 금지되었다. 기독교에 조예가 깊던 청의 강희제가 붕어하고 옹정제가 등극하면서 선교사들은 마카오로 추방되었다.

1742년 11월 2일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聖諭』를 반포하여 유교의 사상과 의식(拜天, 祀孔, 祭祖)이 우상숭배라는 최종 유권해석을 내리고 기독교 신도는 이러한 의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렸으며, 이로써 100여 년에 걸친 전례논쟁은 막을 내렸다. 프랑스 예수회의 포교권이 영국으로 넘어갈 즈음인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마침내 예수회의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는 곧 유교문명을 화해적 입장에서 서구에 소개해 오던 후원자를 상실한 셈이 되었다.

   3. 계몽주의 및 중상주의 시기(18세기 중엽~19세기 초엽)의 유교관
 18세기 초반의 서구문화는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풍을 숭상하는 로코코 시대를 맞이하였다. 동양의 도자기?사직품(絲織品)?칠기?미술?건축 등은 이 시기 서구의 문화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동학서피(東學西被)’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에 들면서 서구는 수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성적 사유의 분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른바 계몽운동 시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이성이 신앙을 대체하고 철학이 종교를 대체한 시대이다.

계몽시기의 사상가들은 신의 권위와 절대 왕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이성’에 의하여 세계와 인간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계몽사상가들은 ‘이성’과 ‘진보’의 기치 아래 교회와 황 그리고 세습귀족의 권위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부터 이미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에 소개되어 왔던 유교사상은 ‘이성’에 의하여 세계의 ‘자연법적 질서’를 탐구하던 계몽사상가들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특히 유교의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도덕정치의 이념은 절대왕정에 대항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던 계몽사상가들에게 이상적 정치철학으로 보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들이 묘사한 유교적 군주는 ‘계몽적 지도자’의 典範으로 비쳐졌다. 또한 계몽운동 시기에 세계를 ‘신의 질서’가 아니라 ‘이성적 질서’로 파악하려 했던 독일의 이신론(理神論)과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무신론은 신유학의 ‘理적 세계관’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계몽시기 프랑스에서 유교사상을 적극 수용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를 들 수 있다. 볼테르가 지닌 동양문화에 관한 지식은 그보다 조금 앞서 활약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 볼테르의 유교사상에 관한 지식은 오히려 교회권력과 예수회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는 자신이 반교권주의자라고 자처하였으며, 18세기 프랑스에서 교회권력의 붕괴는 전적으로 볼테르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교회권력에 대한 대항뿐 아니라 절대왕권에 대항하여 위로부터의 개혁을 꿈꾸던 볼테르에게 유교적 성황정치는 이상적인 정치의 전형으로 비쳐졌다. 특히 콩트?부베?노엘 등의 선교사에 의해 소개된 유교의 정치?도덕 철학은 혼란에 처한 당시의 프랑스 현실 속에서 일종의 이상으로 비쳐졌다.
볼테르가 태어난 직후인 1696년 콩트(Louis le Comte, 1655~1728)는 파리에서 『중화신인상기(中華新印象記)』를 출판하였는데 서간집인 이 책의 제2권에서는 유교의 인정(仁政)에 대하여 상술하고 있으며, 부베(Joachim Bouvet, 1656~1730) 신부는 1697년 파리에서『중국황제소사(中國皇帝小史)』를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청의 강희제를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묘사하고 유교적 성황 정치의 구체적 실현의 예를 담고 있다. 또한 예수의 신부 노엘(Francois Noel, 1657~1729)은 1711년에『육경』을 펴냈는데, 이러한 책들은 볼테르를 위시한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애독되었다.
볼테르는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공자와 유교에 관한 책을 읽고, 유교야말로 기적이나 현담(玄談)에 근거를 두지 않은, 이성에 기초를 둔 자연법적 도덕이라고 생각했다. 볼테르는 그가 쓴 글 중 80개의 작품과 200여 통의 서간문에서 유교 문화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혼란스런 사회현실에 분노했던 볼테르의 눈에 유교문명은 덕성(德性)의 문명이었으며, 유교적 군주들은 이상적인 ‘개명군주(開明君主)’로 비쳐졌다. 신과 교회의 권위 그리고 절대왕권에서 벗어나서 신적 질서 대신 자연적 질서를 탐구하고 계시에 의한 신앙 대신 이성에 의거한 지식을 모색하던 볼테르에게 유교사상과 민본정치의 이념은 그가 목마르게 찾고 있던 진리 그 자체였다. 볼테르는 유교의 본질이 하늘을 공경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가르침으로 보고 공자를 천하에 둘도 없는 사표라고 보았다. 볼테르는 그의 연구실에 공자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경배하였다고 한다.
볼테르의 유교에 관한 생각은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 등의 백과전서파에 전수되었다. 원래 ‘백과전서’는 영리에 밝은 한 서점이 착수한 사업기획의 하나였으나, 견실한 시민계급 출신인 디드로가 이 사업을 위임받은 후 그는 사람들의 인식을 중세 때부터 계속되어 온 종교적 세계관에서 이성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방향으로 편집방침을 정했다.

백과전서파는 종교적 권위가 아닌 이성이야말로 진리의 기초가 되며, 인류의 진보는 자연의 질서를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백과전서파는 진정한 정치는 이성에 기반을 둔 법에 의한 통치에서 가능한 것이며, 교육은 종교교리를 암기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지혜를 배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유학이 지닌 합리적 세계관과 도덕적 군주관 그리고 덕성의 교육은 이들 백과전서파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계몽시기에 ‘중농주의자’라고 불렸던 일군의 경제학자들도 유교의 정치?경제?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 추진했던 공업정책의 실패에 자극을 받은 이들 중농주의자들은 유교의 성왕과 같은 ‘개명군주’가 다스리는 농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이상사회로 삼았다. 중농주의자 케네(Quesnay, 1694~1774)는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자연만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부의 생산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연적 질서와 인간의 질서를 하나로 연관짓는 통일적 질서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유교의 천인합일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유교의 자연관과 사회관을 극찬하였으며, 사후에 그의 입장은 제자인 미라보(Mirabeau)에 의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유교사상의 요지는 인간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여 다시는 우매함과 정욕에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공자가 가르쳤던 것은 경천외인(敬天畏人)과 물욕의 극복이며 정욕이 아닌 이성으로 행위의 표준을 삼는 일이다. 공자는 이성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말도록 가르쳤다.  도덕을 세상에 펴는 일, 이것이야말로 나의 스승이 하려고 했던 일이었다. 나의 스승 케네는 자연이 준 비전(秘傳)을 밝혀냈으며, 이것이 바로 경제의 체계이다.
케네의 유교사상에 대한 숭배 때문에 당시의 중농주의자들은 그를 ‘유럽의 공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계몽시기 독일에서의 동양문화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에 못지 않았다. 칸트(Immanuel Kant)의 스승인 슐츠(Schults)의 스승이었던 크리스찬 볼프(Christian Wolf, 1679~1754) 역시 유교사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라이프니츠의 이신론(理神論)에 영향받은 그는 유교사상과 기독교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유교의 도덕철학은 그가 수립하고자 했던 자연도덕(신의 계시에 의한 도덕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과 부합된다고 믿었다.

그는 유교의 도덕이 인간의 본성과 정감에 합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유교를 상당히 합리적인 사상으로 생각했다. 그는 강연을 통하여 독일의 대학에서도 합리성에 기반을 둔 덕성의 배양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유교적 교육은 이상적 교육의 典範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동교교수들로부터 무신론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프러시아 국왕 프레데릭 1세는 그를 대학교수직에서 해임하고 추방명령을 내렸다. 후에 그는 다시 소환되어 궁정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계몽시기 유교문명에 대한 예찬은 18세기 말 중상주의의 흥기와 더불어 쇠락을 맞게 된다. 이 시기에 유교문명에 대한 관심이 쇠락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예수회 선교사들은 영국?네덜란드 등의 신교도 상인들과 빈번하게 의견 충돌을 일으켰으며 상업적 시각으로만 동양을 바라보던 신교도 상인들은 동양문화에 우호적이던 예수회 선교사들을 유럽에서 파견된 간첩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유럽의 지성계에서 차지하던 선교사들의 비중 때문에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의견이 우위를 점했으나, 18세기말에 들어 중상주의의 흥기에 따라 동양문화를 비천하게 보는 상인들의 입장이 우세하게 되었다.

둘째, 유교를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서구에 소개해 왔던 프랑스의 예수회가 18세기 중엽 해산됨(1773)에 따라 동양 문화를 서양에 우호적으로 전파하던 후원자를 상실한 셈이 되었으며, 교황청의 제사의식의 금지에서 초래된 옹정제의 선교사 추방령은 곧 동양 문화 서양전파의 매체를 상실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은 서구인들은 동양을 낙후한 전제국가로 보기 시작하였다. 또한 18세기말의 산업혁명과 더불어 신흥자본계급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들 자본계급은 동양문화에 대한 식견이 짧았으며 산업혁명에 성공한 자신의 나라에 비해 동양을 낙후한 지역으로 경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에 뒤이은 상업자본의 팽창에 따라 동양에 대한 문화적 관심은 점차 상업적 관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상업경제의 흥성과 더불어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문화적 古國으로서의 동양이 아니라 광대한 상업시장으로서의 동양이었다. 이제 국제분쟁과 무역시장에서 번번이 패하기만 하는 동양은 유럽인의 누에 이미 문명제국이 아니라 쓰러져 가는 거구의 노인에 불과하였다.
몽테스키외, 콩도르세, 헤르더, 헤겔 등의 동양관은 18세기말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경멸적 시각을 대변해준다. 몽테스키외(Charles Montesquieu, 1689~1755)와 그림(Grimm, 1723~1807) 같은 이들은 법철학적 입장에 서서 동양에는 삼권분립과 같은 정치제도가 없는 철저한 전제국가라고 비판하였다.

프랑스의 수리철학자 콩도르세(Condorcet, 1743~1874)는 “그처럼 오랫동안 인류를 욕되게 하면서도 중단되지 않은 아시아적 전제국가의 정체성을 비판한다”고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18세기말 동양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의『인류 철학사의 이념』에서도 엿보인다. 그는 이 책에서 동양인들은 정신적 진보와 개선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헤르더의 중국 문명에 관한 지적은 그대로 헤겔(G. W. 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 이어지게 된다.

헤겔의 시대는 이미 ‘철학의 시대’를 넘어 ‘과학의 시대’로 진입하는 시대였다. 헤겔은 철저한 유럽중심주의적 입장에 서서 동양문화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역사철학』에서 인류의 역사를 ‘이성의 자기전개’라는 관념적 도식에 따라

(1)동방세계, (2)희랍세계, (3)로마세계, (4)게르만 세계라는 4단계로 구분하고,

동양의 문명은 인류역사의 최유년기인 제1단계에 정체되어 있는 ‘비역사적 역사’ 즉 역사가 없는 문명으로 보고 그 이유로 정체성, 전제성, 그리고 비과학성을 들고 있다.
동양의 후진성 정체성이라는 19세기 서양의 명제는 인종차별에 대한 ‘과학적 정당화’를 거쳐 학문적 진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큐비어의『동물계』(Le Regne Animal), 고비노의『인종불평등론』(Essai sur l'Inegalite des Races Humanies), 그리고 로버트 녹스(Robert Knox)의 『흑인종』(The Dark Races of Man)과 같은 생물학적, 인류학적 저서들은 선진인종(유럽, 아리안인종)과 후진인종(아시아, 아프리카인종) 간의 흑백론적 구분을 과학적으로 정당화시킨 속류 다윈주의라고 할 수 있다. 비난과 경멸로 가득 찬 이 시기 서구인들의 동양관은 상업자본의 팽창과 제국주의적 침략을 거치면서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전해지게 된다.

            4. 제국주의 및 냉전시기(19세기 중엽~20세기 중엽)
 19세기 중엽 이후의 세계사는 고도로 발달한 서구 자본주의가 상품시장의 개척과 잉여 생산수단의 확보를 위해 서구 이외의 지역을 대상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착취와 수탈의 역사였다.

18세기 후반에 제1차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19세기에 들어서는 국제 무역과 정치?외교를 주도하였으며, 홍콩?인도?아프리카 등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하여 한때는 세계인구의 4분의 1, 그리고 지구면적의 4분의 1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독일은 중동?아프리카?극동에 걸쳐 광대한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미국은 하와이, 필리핀을 합병하고 알래스카를 사들였으며, 프랑스는 월남,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콩고 등을 강점하였다. 제국주의는 그 자체가 잔인하고 철면피한 수탈이었으며 동양 각국을 희생양으로 한 서구문명의 겁탈이었으나 제국주의자들은 이를 여러 가지 이론으로 합리화하였다.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만일 중국인이 자기 나라에 평화적 통상과 문명생활을 촉진할 여건을 조성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한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전형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경제력과 군사력을 손에 쥔 이 시기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동양인은 ‘진보’를 모르는 미개인이었다. 베를린 대학의 교수였으며 근대 서양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동양을 ‘영원한 정지’의 상태에 있는 정체적 국가라고 했으며, 당시 독일에서는 공자(Konfuzius)를 독일어로 발음이 비슷한 ‘혼란에 빠진 자(Konfusions)’라고 부르며 희롱하기도 하였다.

또한 영국의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96~1873)은 동양인들은 통치권력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시도해 본 적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체와 해체의 반복을 걸어왔다고 보았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서구인들에게 동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가설로 정리된다.

 (1)동양은 정체적이며 진보가 없다.

(2)동양은 다만 외부적 힘의 충격에 의해서만 변화할 수 있다.

(3)오직 근대 서구만이 이러한 힘을 가할 수 있으며, 충격과 더불어 동양은 서구적 모습으로 바뀔 것 산업혁명에 이어 제국주의적 진출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서구인들은 야만상태에서 시들어 가는 동양이 진보된 서구의 ‘문명’을 수혈 받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맑스와 동시대의 영국 법학자 존 웨스트레이크(John Westlake)는『국제법의 제원칙』에서 ‘비문명적’이라고 불리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은 선진문명에 의해 병합 또는 점령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대 서구인들의 이러한 동양관은 유럽중심주의의 표현이자 동시에 물신주의와 경제성장에 광분하던 자본가들의 세계관을 여과 없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을 ‘자본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간주하던 19세기말 서구인들의 편견에 찬 시각은 20세기초에도 그대로 이어져, 사회과학의 천재라고 불리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8~1920)의 동양관에도 투영되어있다. 베버는 제국주의적 침략의 극성기에 그의 청년기를 보냈다.

이 시기의 유럽은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점령하고, 프랑스는 자기 나라보다 20배나 되는 땅덩어리를 차지하였으며, 러시아는 시베리아 대평원을 손에 넣었다. 1차 세계대전 말까지 유럽의 지배에 놓인 식민지는 전지구 면적의 85%까지 확대되었으며 그 영향이 가장 현저했던 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였다. 유럽인들은 열대지역이던 한대 지역이던 가릴 것 없이 모든 땅에 깃발을 꽂고, “자신의 땅”을 선언하였다.

헤르더와 헤겔 그리고 랑케에 이어지는 유럽중심적 세계관은 베버의『유교와 도교』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베버의 이 책은 그의 이전 저서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베버가 일생을 두고 연구한 문제는 “왜 자본주의는 서양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던가”라는 문제였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을 설명하는데서 경제적 요인 뿐 아니라 종교?문화적 심성도 자본주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역사발전의 다인론(多因論)’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주술적 세계에서 탈피한 합리성이야말로 역사발전의 동인이며, 서구문명의 탈주술화 - 즉 합리성으로의 이행과정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꽃을 피웠으며,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지닌 소명의식, 금욕, 절제 등의 가치 합리적 요소는 자본주의 발달의 인과론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베버는『유교와 도교』에서도 ‘역사발전 다인론’이라는 전제하에 ‘유교문명에서는 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하였는가’하는 문제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유교에도 합리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서구의 ‘현실에 대한 합리적 지배’와는 달리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적응’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유교문명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유교가 주술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서인 - 관료들은 군주를 선정으로 유도하고, 폭정을 금하기 위하여 주술적 요소를 남겨놓았으며, 가산관료제는 교육을 통해 신분 카리스마를 재생산해 내던 유학자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산관료제의 핵심 사상인 유교는 그 특징에서 진보를 저해하는 전통주의, 전문가에 대한 경시, 애니미즘적 조상숭배, 정의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인간관계, 추리능력의 결여, 무조건적 현세긍정 등으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베버는 유교가 지닌 이러한 문화적 요소들 때문에 동양에서 자본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고 보았다.
베버의 원래 관심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와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서구 밖의 사회에서 증거를 끌어 올 필요를 느꼈고, 유교는 그의 지적 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는『유교와 도교』에서 프로테스탄티즘 대신 유교를 넣어 분석하였으며, 자신의 기본 구도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유교에서 필요한 부분만 끄집어내어 프로테스탄티즘고 대비하는 요소론적 방식을 취하였다.

베버의 요소론적 방법론에는 자료의 편의주의적 적용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프로테스탄티즘과 달리 유교는 주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그의 관점에는 종교 신학적 배타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 특히 신의 세계와 속세를 이원론적으로 첨예하게 구별하는 기독교적 구원 종교가 유교의 일원론적 세계관에 비해서 합리화의 조건을 좀 더 잘 만족시킨다는 그의 합리성 이론은 유럽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베버의 ‘근대서양=자본주의=합리적’이라는 도식은 서구 자본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조는 20세기의 냉전시기에 들어서는 이른바 ‘근대화론’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여 이어진다.
조셉 레벤슨(Joseph Levenson)은 1958년에서 1965년 사이에 3부작으로 된『유교적 중국과 그 근대적 운명』(Confucian China and Its Modern Fate)을 출간하였으며,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이 근대 서구문명의 도전에 직면하여 해체되고 마침내 완전히 새로운 문명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 있는 ‘운명’이라는 불길한 단어가 암시하듯, 그는 유교문명의 사망선고를 내림과 동시에 동양은 근대화, 즉 서구 자본주의 문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묵시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레벤슨의 이러한 견해는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레이그 등에게 이어지며, 이들은 한결같이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한, 그들은 변혁이 아니라 단지 ‘전통속의 변화’만을 경험할 뿐이다”라고 단언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5. 當代 (20세기 후반~ 현재) 서구인의 유교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세기 중반 이후 지속되던 냉전체제는 1980년대 말에 들어 구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더불어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보다 조금 전인 1978년 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종식과 더불어 실용주의적 노선으로의 선회를 결정하고 ‘중화민족의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의 건설을 모색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공자에 대한 재평가와 유교사상의 부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중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사회주의’의 노선을 천명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역동적 변화에 따라 유교를 ‘전근대성의 상징’ 혹은 ‘정체성의 상징’으로 보아오던 베버나 레벤슨의 ‘근대화론’적 시각도 점차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레벤슨의 ‘유교 사망론’에 반기를 든 투웨이밍(Tu Wei-ming) 교수는 ‘유학 제3기 발전론’을 들어 레벤슨에 정면으로 반격을 가하였다. 그의 논리는 일종의 ‘유교 부흥론’이라 할 수 있다.
레벤슨은 근대 이후 중국에서 유교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고 단언하였으나 투웨이밍은 이와 반대로 미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문화는 인문정신을 골간으로 하는 유교문화라고 주장하였다. 투웨이밍은 근대 이후 서양의 문화는 지나치게 물질적인 측면에만 편중해왔으며 인문정신과 도덕가치를 소홀히 해왔다고 비판하고, 근대 서구문명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전통유학의 창조적 진화 내지는 부활을 주장했다.
계몽시기부터 시작하여 제국주의를 거쳐 냉전시기에 이르는 서양의 공자에 대한 폄하적 담론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 서양 후기산업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류를 타고 급격하게 일변하기 시작했다. 즉 이전에는 정체성과 전근대성의 상징으로 대표되던 공자가 이제는 정반대로 예찬의 대상으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20세기 후반 서양 후기산업사회에서 공자 예찬론의 선두는 바로 에임스(Roger Ames)와 홀(David Hall)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의 공자에 관한 시각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는 저작이 바로『공자를 통하여 사유하기』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공자관을 가능케한 담론적 공간은 무엇이며, 공자 예찬론을 유포시키는 이러한 담론의 주체들의 궁극적인 관심은 무엇인가? 저자들은 현대 서양(서구사회)이 직면하고 있는 문화적 위기의 해결을 위해 공자 사상을 원용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저자들은 공자를 현대 서양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스크모던적 담론의 ‘잠재적 참여자’로 끌어들여 현대 서양에 만연한 ‘문화적 위기’ 또는 ‘철학의 종말’에서 헤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에임스와 홀은 저서에서 서양의 이성중심주의가 걸어온 길과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소개한 후, 획시대적 위기에 직면한 서양철학은 이분법적 전통, 인식론적 전통, 이론과 실천의 윤리에 너무도 깊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서양철학 자체의 노력으로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서양철학은 자체적으로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므로 이제 다른 문화권의 철학으로부터 대안적 사유를 배워 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이 책을 저술하는 목적이 단순하게 공자의 참모습을 밝혀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사유를 다른 문화권으로부터 배워오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세계를 ‘논리적 질서’로만 파악하려는 서양의 사유구조는 구체적인 '개별자'를 무시한 채 항상 타자로 ‘환치(換置)’될 수 있는 극도로 추상화되고 ‘양화(量化)’된 ‘동일자’만을 탐구의 대상으로 여겨 왔다.

이러한 사유구조에서 탄생한 결과물은 ‘법앞에서의 평등’, ‘인권’, ‘보편적 본성’과 같은 개념들이다. 이러한 개념을 소재로 하는 서양의 사회철학은 플라톤이나 헤겔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나치게 ‘획일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자유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일률적으로 양화될 수 있는 개별자들의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세계를 미학적 질서로 파악하는 공자의 사유방식에서는 보편자 대신 개별자를 강조하며,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별자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미학적 조화’를 이상적인 사회질서로 여긴다. 획일성, 보편성, 동일성을 강조하는 서양의 사회철학에서는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양극의 결과물이 산출되지만, ‘부분’과 ‘전체’간의 유기적 조화를 이상으로 삼는 공자의 사회철학에서는 개인과 사회,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사이의 조화가 결과물로 산출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은 유교의 사유방식이 과학과 이성으로 찌든 서양철학적 사유방식의 치료제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해체주의적 전략을 통하여 서양철학은 다시 재건(reconstruction)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피력하면서 책을 끝맺는다.

                                              6. 결론
17세기부터 21세기 현재까지 서양인들이 유교를 바라보아온 관점은 그야말로 편견과 왜곡의 역사였다. 서구인들은 유교사상에 접근할 때, 철저하게 자신들의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같은 사료를 놓고도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폄하와 예찬의 양극을 달렸다.

17세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교의에 맞게 유교를 해석하였으며, 신유학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18세기 계몽시기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지나치게 유교를 이상화시키기도 하고 폄하하였다.

프랑스에서 볼테르는 절대왕정을 비판하기 위하여 유교적 군주를 ‘개명군주’로 치켜세웠지만, 영국에서는 세습귀족들이 신흥 자본계급을 억누르기 위해 유교적 전제정치를 典範으로 내세웠다. 디드로는 종교의 권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교사상을 이신론으로 예찬하였지만,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을 수립하기 위하여 유교적 전제정치를 비난하였다.

사실, 18세기 유럽에 소개된 유교사상은 계몽운동의 것이지 자기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성공과 상업자본의 팽창으로 이어지는 18세기 후반부터 서구인들의 눈에 유교는 더 이상 이상적인 모델이 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모태가 되었던 유태교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공격받듯이 계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유교사상은 거꾸로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둔갑했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기 서구인들의 정체적 동양관은 상업자본 확보와 잉여 생산수단의 확보를 위하여 시장과 자원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제국주의적 합리화의 결과였다. 이 시기 서구인들은 동양을 상품경제 속으로 끌어들이고 시장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관심에서 동양문명에 접근하였고, 동양의 자연경제 조직을 절멸시키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동양의 후진성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또한 20세기 중반 냉전시기의 서구인들에게 비친 유교문명은 미개와 야만, 그리고 정체성과 전근대성의 상징이었고, 동양인들이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서구문명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20세기말의 후기 산업사회에 들면서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은 또다시 180도로 급변한다. 이른바 포스트 모던 철학자들은 ‘이성’에 의해 자연과 인간을 지배하려는 ‘계몽적 기획(enlightenment project)’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근대 서양철학의 종언을 고함고 동시에 새로운 사유를 시험하고 있다.

계몽시기 이래 서구를 주도해온 ‘유럽중심주의’가 해체됨에 따라 후진적, 퇴행적, 야만적, 미개적, 정체적, 前근대적(문명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동양의 문화는 다시 예찬과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판 ‘보유론(補儒論)’에 안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서구의 동양침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자본의 논리는 국민국가의 주권을 무너뜨리고 보편문화의 미명 아래 동양의 고유문화는 폐허의 상태에 방치되어 있다.

동양 각국의 자본제적 재편성을 통하여 과거 ‘아시아적 전제주의’의 야만성은 화폐와 자본이라는 새로운 예속의 틀에 지배당하게 되었고,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미개성은 탐욕스러운 자본가에 의한 ‘물신숭배적 투쟁’으로 대체되었다.

미국에서의 유교사상 이해에 대한 새로운 열기도 따지고 보면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경제침략을 위한 문화적 정지작업이거나, 아니면 동아시아 각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에 대한 경계의 시선에서 출발한 전략이거나, 아니면 서구인들이 자초한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적 사유구조의 모색으로서의 관심표명으로 보인다. 출처 : Akard Community

출처 : 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글쓴이 : 書拉密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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