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역사의 예수.

[스크랩] 역사의 예수-1

잔잔한 시냇가 2006. 10. 6. 06:47

신학강좌는 이제부터 역사의 예수를 다루어볼까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예수님,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이신 예수님....

 

그 모습을 추적하기 전에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한 문제가 있습니다.

 

 

 

1. 역사 비평 해석학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우리가 이용하는 방법론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준점이지요.

 

그것이 바로 역사 비평 해석학이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신약성서의 모든 진술을 일단 역사적으로 비판-검증-해석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는 인간과 세상이 살아가는 유일한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를 떠나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서에 나타나는 진술들은

 

역사를 넘어가는, 다시 말해서 신화론적 사고방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역사를 사는 우리 현대인으로서는

 

성서의 문자를 글자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번 걸러서 이해하는데,

 

그게 바로 역사 비평적인 해석학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한 번 걸러내어 해석하는 작업이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이 방법론은 세계의 성서학계에 공인된 방법입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받아들여진 방법론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안병무 씨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갈릴레아 예수라는 책을 써서 역사의 예수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정양모 신부가 중심이 되어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논문과 글을 통해서,

 

또 특강이나 학교 강의를 통해서 그 작업을 해내었습니다.

 

 

 

2. 비신화화 계획

 

 

성서의 언어....는 인간의 어떤 사고방식 속에서 쓰여졌을까요?

 

한마디로 성서는 신화론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이런 결론은 근-현대의 학자들이 발견한 것입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이런 발견은 없었고

 

그냥 실제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모든 기사들을 그냥 실제적인 것으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렇게 알아듣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역사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합니다.

 

그런 기사들은 신화론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기에

 

그냥 글자그대로 알아듣지 않습니다.

 

성서의 세계관은 요즘의 관점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 당시에는 신이 인간 세계에 아무런 여과없이 그냥 마구 등장합니다.

 

그래도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신과 인간이 함께 뒹구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당시는 그게 자연스런 삶의 모습이요, 자연스런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었지요.

 

 

 

비신화화 계획은 독일의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제안입니다.

 

불트만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종말론적 설교와 신화론적 교훈들은

 

그 신화론이라는 껍데기 속에 

 

어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밝히 신화론적 개념을 제쳐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깊은 의미의 보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해석방법, 즉 신화론적 개념 뒤에 들어있는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방법을 불러서 나는 비신화화 계획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확실히 불완전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신화화의 목적은 신화론적 기사들을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찬-반이 뜨겁게 대립되었습니다.

 

찬성: 옳소!! 브라보!!

 

성서의 언어를 아무런 여과 없이 그냥 받아들이면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성서가 반-이성적, 맹목적이 됩니다...

 

성서의 모든 진술을 역사 비평 해석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반대: 말도 안돼요..!!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역사적으로 재해석하는 순간, 모든 종교는 끝이 납니다.

 

그리고 초역사적인 실재인 신(하느님),  천사(악마)들을 어떻게 재해석하겠습니까?

 

또 천국, 지옥, 동정녀 탄생, 승천, 심판, 재림, 종말 등을 어떻게 재해석하겠습니까?

 

영원히 재해석이 안 됩니다.

 

그냥 옛날대로 놔둡시다. 그래야 혼란이 없고, 편안합니다...

 

 

 

어쩝니까?

 

이론적으로는 재해석해야 하지만,

 

실제로 적응시킬 때에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문제는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지요?

 

더 이야기하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3. 정당성과 한계:

 

 

이론적으로는 역사비평 해석학, 비신화화 계획이 정당하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적용시킬 때 대단히 어렵습니다.

 

반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만을 고수하여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한 마디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검증이 안 된 것을 마치 검증된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이요 자기 확신이지 검증이 안됩니다.

 

또 자료가 특수해서 해석이 일의적이지 못하고 다의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많은 경우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역사적으로 다 밝힐 수가 없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는 한계가 있고,

 

또 기성 종교는 그런 해석을 용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역사의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신약성서뿐인데, 

 

그 자료는 역사의 예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신앙의 대상으로 재해석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진실을 추적해 가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예수님을 힘닿는 데까지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작업을 게을리하면 실제의 예수님, 역사의 예수님은 사라지고

 

괴상하고 이상한,

 

진실이 사라진, 맹목적인 예수님을 붙잡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역사의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출처 : 수신
글쓴이 : 사랑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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