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요한복음의 구원론
요한복음의 구원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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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1. 서론 요 20:31절이 밝히듯이 요한복음의 목적은 기독론과 구원론이 두 개의 주요 주제임이 분명하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 관한 연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주제로서의 요한복음의 구원론은 상대적으로 적게 연구되어 왔다. 이제 우리의 주의를 요한복음의 구원론에 돌려보자. 이 글에서 전개되는 요한복음의 구원론은 회당(즉 모세의 제자들)과 요한 공동체(즉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갈등의 상황 속에서 발전되어 결정된 것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질문은 하나님은 어디에 그리고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이다. 이 질문은 불신 유대인의 회당과 기독교의 교회가 각각 가지고 있던 확신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편이며 자신의 종교만 참 종교라는 확신과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다른 이해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대답되어진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요한이 그의 구원론을 전개해 감에 있어서 핵심적인 구성요소임이 앞으로 증명될 것이다. 요한은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포괄적이고 무역사적인 구원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 갈등에 기초하여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어디서 보이며, 누구와 함께 하시는가? 라는 질문에 의해 형성된 구원론을 제시한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구원론적인 표현들을 무시간적 혹은 닫친 체계로 다루는 것도 잘못이며, 또한 요한의 구원론을 십자가 신학이나 화해와 대속의 개념에 무조건 상반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요한의 구원론의 특성과 목적을 오해한 결과이다. 2. 구원의 하나님은 누구인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사마리아인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 구원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오기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예배한다.” 이 대화는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다룬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모세의 제자들 모두 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은 있을 수 없다. 이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능동적으로 역사하신 분이시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역사하셨고,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분이시며,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요 9:29) 하나님이시며, 그리고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설명을 첨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현존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이 하나님을 예수님 자신이 나타낸다고 말씀하며, 동시에 그의 대적들 (모세의 제자들)도 예배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자증적 (self-evident)인 결론처럼 보이지만 다음의 이유들로 인해 우리의 논의를 위해 중요하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주장하는 이 두 개의 대립되는 그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이미지와 이해에 기초한다. 이 동일한 하나님에 관한 이 두 그룹의 견해는 요 8:14-59절과 10:31-39절의 예수님과 그의 대적 사이의 논쟁에서 분명해 지듯이 상반된다. 동일한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이 두 그룹 사이에 있는 견해의 차이점들에 더 예리하게 초점을 두게 한다. 구원의 과정 중에, 예수님의 대적들 역시 그들의 하나님에 관한 견해를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이 마귀 혹은 신성모독자가 아니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려지는 한, 하나님은 이제 그런 고백을 한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보여지며 만난바 될 수 있는 분이다 (20:28). 3. 모세의 제자들의 확신과 종교적 행위들 갈등의 상황이 요한복음 이야기 전개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음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 갈등의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결과 요한복음의 구원론의 배후에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대립하는 이 두 그룹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주의는 먼저 모세의 제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안의 예수님의 대적들에 대한 자료의 분석은 그들을 부분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부분적으로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낸다. 3.1 모세의 제자들의 긍정적인 모습 유대인 (the Jews, Ioudaioi)으로 종종 불린 모세의 제자들의 간략한 범주화 (9:28-29)를 위해 다음의 사실이 중요하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육신적인 정체성은 분명하다. 이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지며, 아브라함 심지어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8:41). 가장 최선의 것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서 준행된 그들의 종교적인 활동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심이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종교적인 문제들이 조직되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 주위의 예루살렘 안에서 아주 활동적으로 보인다. 성경의 연구는 그들의 종교적인 노력의 초석을 이루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섬기려는 그들의 바람은 그들의 헌신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정결법과 종교적인 절기를 철저히 지켰다. 특히 안식일이 중요했는데, 예수님을 죽이고자 원했던 이유는 예수님이 이것을 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행위 속에서 종교적인 열광자로 묘사된다: 그들은 성도를 죽이려고 시도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옳건 그르건 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관해 성실했다. 잘 조직화된 종교적인 집단으로서 모세의 제자들은 제의적 활동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시도하는 자들로 비쳐진다. 지금까지 그들의 모습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은 구원을 보장하는 데는 불충분하다. 종교와 종교적인 행위들은 구원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 3.2 모세의 제자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나? 모세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의 초점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 없는 종교를 신봉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않아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 그들의 사회-종교적인 열정과 상관없이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다. 이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는 예수님을 거역하고 미워한 사건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의 죄의 본질은 명확하다: "예수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그들이 믿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죄에 대한 개념을 분석해 보면 이 사실이 더 분명해 진다. 요한복음 안에서 죄의 본질이 개인적인 행위의 관점에서 설명되지 않고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알지도 영접하지도 않은 관점에서 설명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적들과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 없는 것이기에,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문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3:36; 5:24). 요약하자면, 만일 다음의 질문 즉 “요한에 의하면 사람이 어떤 무슨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그 대답은 예수님 안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고 알기 위해서 필요한 영적인 지식의 부족과 소경 됨이라는 죄로부터이다. 즉 하나님이 없는 이 실존적인 상황의 결과는 이 대적자들의 성자와 성부의 거부이며 그들의 악한 행위들이다. 3.3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떻게 보았는가?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발견했던 문제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안에 묘사된 이 문제에 초점을 모아 보자. 그들의 주요 비판이 요 5:18절에 나타난다: “이 일을 인하여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 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음이러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함으로써 유대인들로부터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했다. 이 고발은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나며 (요 10:3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구실이 되었다 (19:7). 그들의 비난의 본질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다. 그는 죄인이며 (9:24) 귀신들렸다고 고발당했다(7:20; 8:48, 52; 10:20-21).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세의 제자들의 결론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다”이다. 이것이 왜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사람으로 비쳐진 이유다. 모세의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4. 구원으로 인도하는 대답 불트만과 그 이후의 포어스텔 (Forestell)과 같은 학자들은 요한의 구원론을 단지 하나님의 계시의 관점에서만 묘사한다. 비록 이 견해의 배타성이 지난 수 십 년간 교정되어 왔지만 구원론적 과정의 핵심으로서의 계시의 중요성은 부인될 수 없는데 이것이 구원론적 질문에 답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구원이 발견되는가?”에 달려있다. 요한의 대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단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만나질 수 있다. 성령님은 이것에 대한 증인이다.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셨다. 하나님의 좌소에 대한 갈등은 기독론 논의에서도 쟁점이 된다. 4.1 요한복음의 중요한 구원론적 이슈: 하나님은 어디에서 발견되어지는가? 이것은 우리를 다음의 질문으로 인도한다: 유대인들의 종교와 같이 아주 체계화된 종교 공동체 안에 어떻게 믿을 만한 방식으로 그러한 변화와 새로운 종교의 주장이 가능했는가? 우리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1) 계시자로서의 예수님에 관한 주장들, (2) 이 주장들이 어떻게 실제화 되었는가? (3) 구원론적인 결과들과 이 주장의 결과들에 대한 논의가 뒤따를 것이다. 4.1.1. 주장: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신다. 예수님의 주장은 분명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다 (14:9), 그리고 나를 믿을 때 그 사람은 나만 믿은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분을 믿은 것이다. 나를 볼 때 그 사람은 나만 본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낸 분 (성부)을 본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과 더불어 하나님의 좌소는 변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있고 만일 그의 대적이 그를 영접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 사실 이것은 좀 과격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적을 향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중심 주장은 이 사실에 근거한다. 이것은 우리를 다음의 질문으로 인도한다: 왜 특정하게도 예수님만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신가? 무엇이 그로 하여금 특별하게 만들었나? 물론 이것은 하나님과 성자의 특별한 관계로 설명된다. 우리의 목적을 위해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여기서 필요하다. 이것과 관련하여 요한복음 안에 몇 몇 잘 알려진 개념들이 있다. 요한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장소성 (즉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한 주장이 몇몇 있다. 예를 들어 너희 (즉 대적들)는 아래로부터 난 자들이다 나는 위로부터이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8:23). 예수님은 성부와의 아주 밀접한 교제 안에서 위로부터 나셨다 (1:18). 성자와 성부의 독특한 관계에 대한 설명은, 성자가 성부를 알고 계시하실 수 있는 특권적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독특한 관계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Immanenzformeln, 즉 성부와 독생자인 성자의 ‘연합’을 통해서이다. 이 독특한 관계에 기초하여, 성부는 성자를 자신의 독특한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계시하도록 기능적으로 준비시킨다는 주장이 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행하도록 가르치셨는데 (5:19), 특별히 구원 (생명)과 심판을 시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만 특권적으로 속한 일들이다. 그의 준비에 기초하여, 아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오도록 명령과 사명을 받았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과 일만 행하신다 (12:49). 이 사실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계시와 지식을 가지고 오는 분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계시하시고 선포하시고 증거하시며 구원과 심판을 수반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주신다. 이런 기독론적인 주장들은 요한복음의 중심이며, 어떻게 그리고 왜 진리와 생명의 길 즉 하나님의 현존이 예수님의 대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리키신 길을 따르는 것임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 단계에서의 질문은: “이 주장을 지지할 다른 구절이 있는가?” 이다. 4.1.2 실제화된 예수님의 주장 분명히 예수님과 요한의 대적들은 예수님의 이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은 강도와 도적이요 자신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합법적인 문임을 무슨 증거를 통해 증명하시는가? (요 10:7-10). 합법성의 문제를 언급함에 있어 몇몇 증인들이 소개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세례 요한의 증거를 언급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더 중요한 증거를 하신다. 요 5:37절에서 예수님은 언급하시길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해 증거하신다.” 아버지의 음성은 사실 하늘로부터 들려진 것이다. 요 5:38절에서 예수님은 그의 대적이 생명을 얻는 줄 알고 열심히 연구한 바로 그 동일한 성경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 증거한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예언자뿐 아니라 모세도 예수님에 관해 썼다. 예수님 위에 임하신 성령님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표적이셨다. 바로 이 예수님도 자신의 신적인 아들되심을 증거할 세례를 성령으로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들은 자신의 주장을 합법화한다: 요 14:10-11절-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할 때 나를 믿으라 혹은 적어도 기적 자체의 증거를 믿어라. 요 5:36절-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일과 그 일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그의 영광 (즉 십자가 사건)으로 절정에 달한 예수님의 행위들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은 종종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셨다. 요 8:28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십자가 사건 혹은 (상징적으로) 높이 올리우신 것은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계시의 좌소로 묘사된다. 여기서 질문은 ‘왜?’이다. 논의의 주요 흐름은 다음과 같이 소개 될 수 있다: 아버지와 자신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요 5:19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실제로 배운 바는 아버지처럼 어떻게 생명을 주며 심판을 할 것인가 인데, 이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특권인데 그의 아들 예수님에게 주신바 된 것이다. 암시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궁극적인 증거는 생명과 죽음을 지배하는 주님의 신적 힘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의 부활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심으로 자신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신다. 요 20:28절의 도마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적 신분을 증명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이 계시되었고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이 주어졌으며 구원론적인 수수께끼가 풀려졌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자신의 증거 특별히 그의 행위들로부터 분명해 진 것처럼,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신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왜 계시가 특별히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구원론 전개의 초석이 되는 것인지 이해된다. 십자가의 구원의 힘은 그것의 계시적 힘에 있다. 이 주장은 올바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안에 제시된 기본적인 이슈는 개별적인 죄가 어떻게 화해되며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아니며 이와 관련된 것도 아니다. 이슈는 오히려 여러 대립적인 답을 초래하는 것인데, 어디서 하나님이 발견되시는가? 이다. 요한이 친숙하지 않았거나 거부했던 구원론적인 전승과 관련된 것인 피, 희생, 화해 혹은 죄의 대속과 같은 용어의 부재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실수를 우리는 피해야 한다. 이런 유형의 결론은 요한복음의 구원론이 추상적으로 읽혀 질 때만 도출되는 잘못된 것이다. 분명히 불트만과 그의 동료들에 대항하여, 십자가 사건의 다른 기능에 관한 표지 (signs)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에 엄청난 노력이 있어 왔다. 분명히 이것은 옳은 것이지만 이것이 요한복음의 주요 논의의 중심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요한이 하나의 독특한 입장에 서 있다거나 기독교 전승으로부터 분리된 입장을 견지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요한의 구원론은 절대적으로 無 역사적인 방법으로 형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구원론적 메시지는 특정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형성된 것이고, 이 상황은 직접적으로 그의 구원론적 용어와 주제를 선택할 때 영향을 미쳤다. 4.2 구원의 수납 이 논의의 단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대리자이며, 아버지에 의해 파송된 아들임이 분명해 진다. 이 사실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진다. 예수님은 그 길이며 (17:6)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10:9), 풍성한 생명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다 (10:10). 우리가 물어야 할 다음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의미하는 이 푸른 초장을 소유할 수 있는가? 요 1:12-13절 안에 하나의 대답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구원을 얻는 두 개의 주요 주제들은 여기서 ‘신앙’과 ‘영적인 출생’과 연관된다. 요한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이런 주제들은 그들 자신의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요 3:3절에서 우리는 읽기를: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노니 아무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요 3:16절과 다른 많은 곳에 기록되기를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 영생을 얻음이 신앙과 출생으로 묘사되어 있기에 이 두 주제는 여기서 주의 깊게 연구되어야 한다. 믿음 (동사형 ‘피스튜오’ [pisteuō, 내가 믿는다]는 98회 등장)은 요한복음에서 한 구절 안에서 정의되지 않고, 이것의 온전한 의미는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분명해 진다. 요한복음의 여러 다른 상황들은 서로 연관하여 읽혀져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요한복음에서 ‘피스튜오’ (믿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상이한 방식에 대한 세밀한 논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피스튜오’는 다양한 동기나 실존적인 헌신을 통해서 사물이나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피스튜오’의 용례들의 분석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에게서 기인한 자신의 신분을 포함하는) 예수님의 인격뿐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구원의 신앙을 보여준다. 이렇게 말하지만 믿음의 성격은 여전히 모호하다. 이러한 수용의 참된 차원들과 결과들은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한 질문인 것은 요한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피스튜오’의 모든 용례들이 구원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앙의 다른 차원들이 부각되는 몇몇 구절과 문맥을 살펴보자. 자기중심적인 태도의 위험성이 요 12:42-43절에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되 공개적으로 주님을 고백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보다 사람들로부터 더 큰 칭찬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12:43). 요 6:60-71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무조건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의 가르침이 자신들에게 너무 어려워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앙 안에서의 성숙이 부족했던 사람들이다.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찾으려는 태도는 실제로 구원을 얻는 믿음을 얻는데 방해가 된다. 신앙이 부적당하게 보이는 두 번째 구절은 요 8:30-47절이다. 요 8:31절의 신자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적절하다: “만일 너희가 나의 말을 붙들면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 다음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8:31-32).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삶과 행위를 결정하는 자신의 생각이 되는 그 정도까지 말씀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표현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삶을 변화시키는 자신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과 자유를 연결시키실 수 있었던 이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8:39-42). 그러나 요 8장의 논의는 비록 그들이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않는다면 결국 사탄의 가족에 속하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세 번째 그리고 아마 가장 분명하고 예시적인 복합적인 구절은 요 9장인데 거기서는 눈먼 사람의 육신적이고 영적인 치유를 다룬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부재하시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주님을 변호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변호의 성격은 중요하다. 치유된 사람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치유의 신학적 함의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요 9:27-33절의 그의 논의를 보라), 그의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이 통찰력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 안에 꼬임(twist)이 있다. 비록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차원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변호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예수님의 참된 신분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38). 이것은 행위 없는 영접은 부적당하며, 또한 예수님의 신분을 영접하지 않는 행위 역시 부적당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위의 논의의 핵심을 요약해 보자: 구원적 신앙 즉 구원을 얻는 믿음은 예수님의 메시지와 인격을 자기희생적이며, 지적이며, 실존적으로 즉 종합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 수용의 정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행하는 순종적 삶으로 인도하는 메시지에 일치하여 언행이 완전히 변화되는 정도이다. 하나의 중요한 언급이 남아있다. 신앙은 구원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신앙은 구원을 획득하는 수단이다. 환언하면,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원천이시며 영생의 수여자이신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한다. 4.2.2 구원: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태어남 4.2.2.1 하나님께로서 남 요 1:12-13절에는 신앙과 출생의 관계가 나타난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는 사람은 영생-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이다. 이전 단락의 결론은 여기서 중요하다: 신앙이 구원은 아니지만 사실 구원으로 인도한다. 구원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으로 표현된다(요 1:12-13; 또한 3:3, 5을 보라).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다른 곳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3:16; 보라 3:36; 5:24)는 구절을 읽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남’이라는 말로 번역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믿으면 하나님에게서 난자요,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어남으로써(1:12-13),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3:1-8). 이것은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경험하게 하는 영생 때문이다(요 3:15-16 등). 하나님에게서 태어남, 영생, 하나님의 자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과 같은 용어들은 중요한 은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데, 이런 개념들은 직접적으로 ‘가족 이미지’(family image)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런 용어들은 가족 이미지와 연관된 더 큰 은유의 한 부분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구원은 1세기 개인주의가 아니라 가족 중심 세계의 관점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요한은 성도가 신앙을 얻고 중생할 때 그들에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유비로 설명하기 위해, 이 세상의 일상적인 보통 가정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출생은 한 가정의 일부가 되는 기본적인 구성적 요소이기 때문에, 이것은 요한복음 안에서 가족 이미지를 활성화시키는 효과적인 은유이다. 모든 사람이 이 땅의 가정에 태어나듯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세계(가정) 안에 태어난다. 이것이 바로 왜 요한복음에서 중생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이다(1:13; 3:3-8). 이 영적인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적인 현존과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성도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4:24). 그리고 성령으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영적으로 민감해 지며(3:6) 하나님의 나라 혹은 왕의 가족 안에 존재한다. 구원의 행위 혹은 구원의 순간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 혹은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으로 요한은 은유적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가족 안에 태어남으로 그 사람은 그 가족의 관점에서 재사회화된다(re-socialisation). 이 새 사회(즉 하나님의 가족)는 성도가 그것을 지향하는 기본적이며 중요한 사회가 된다. 이 재사회화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과 영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것과 새로운 사회적 그리고 실존적인 틀 안에서 기능하도록 하게끔 한다. 사실 구원은 反사회(anti-society: 기존의 큰 사회의 틀을 거부하는 새롭고 대개 작은 사회. 환언하면 요한복음에서 反사회라는 말은 기존의 큰 사회인 유대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기독교 신앙으로 뭉친 새롭고 참된 소수인 요한 공동체를 가리킨다)로 인도한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에게서 태어남 혹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출생하는 것은 구원의 순간이다. 4.2.2.2 생명: 출생으로 인해 하나님의 가족 안에 존재함 가족의 삶에 기초한 이 은유적 그물 안에서, 출생은 생명을 결과로 가지고 오는 것이 분명한데, 요한은 실제로 이 은유를 더욱 더 발전시킨다. 요한복음의 ‘조엷(zōē, 생명)는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인 용어다.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의 실제에 참여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 일상 세상에서의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행동하고, 순종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동일한 것이 영생에도 적용된다. 출생을 통해서 이 생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하늘의 실제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 사실은 하나님의 가족과 연관된 모든 권리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천상의 실제 안에, 성도는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하늘의 실재를 평화와 사랑의 형태로 체험하게 된다. 영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의 실제에 온전히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 가족 안에 태어나는 것과 영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새로운 사회적 경계(boundary)를 초래한다. 비록 성도가 그들의 육체적인 공동체로부터 옮기어지지는 않지만, 다른 가족 즉 하나님의 (은유적인)가족은 그들의 삶을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결정 지운다. 여기서 우리는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구원의 개념 즉 모세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면서 형성된 이 개념을 다시 상기해 보자. 위에서 구원이라고 불린 것은 모세의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로 변하여 옮겨지는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옮기는 사람은 실제로 이 소경처럼 육신적 가족들 혹은 그들의 사회적인 지지 체계를 잃어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가족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순간은 영적인 가족 안에 태어나 영생을 받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중요한 점으로 이끈다. 영생은 요한복음 안에서 종종 구원을 표현하는 용어로서 언급된다. 출생의 결과는 영생이다. 따라서 영생에 관한 개념 정의에 의존하면서, 출생은 구원이 발생하는 순간을 묘사하고, 영생은 하나님의 출생이라는 구원론적 사건의 구원론적 결과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인 구원의 결과를 묘사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이 장면의 어디에 적합한가? 신앙은 사람의 행동에 완전하게 부닥치게 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을 완전하고 무조건적으로 영접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하며 주님 앞에 복종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자리매김만으로는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 수 없다. 대신 이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위로부터 하나님에 의해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길을 연다(요 3:3, 5).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고 자신도 제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이 구원의 과정에 중보자이다(요 6:57).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순간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는다(요 1:12-13). 신앙과 출생은 늘 함께 가는 것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신앙은 사람의 태도와 반응을 묘사한다. 반면에 출생은 그 사람의 신앙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변화 혹은 구원의 순간을 묘사한다. 하나님만(영적이며 위로부터의)출생을 주신다. 4.2.3 성도와 그들의 대적들 갈등에 동반되어 나타나는 논의의 기본적인 충격은 사회적인 차원에 미친다. 위에서 언급한 소경의 이야기가 잘 보여주듯이 예수님의 대적은 성도를 자신의 사회적 지지 기구인 회당으로부터 제외시켰다. 반면에 성도는 그들의 대적 (모세의 제자)이 실제 지원 체제인 하나님의 자녀로부터 제외된다고 주장한다. 신자의 눈을 통해 대적의 가족은 무엇과 같은지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4.2.3.1 대적의 지도자 간단하게 우리의 주의를 요한복음의 독특성인 마귀의 역할에 기울여 보자.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광야에서의 시험도, 예수님에 의한 어떠한 귀신 축출도 나타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 자신이 귀신 들렸다고 비난받는다. 그러나 마귀는 불신자의 아비이며 이 세상의 왕자로 묘사된다. 이것은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집단적인 의미를 가진다. 사탄이 '세상 임금'으로 불리는 세 구절의 문맥 안에서(12:31; 14:30; 16:11), 지배적인 주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왕자를 정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왕자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향한 심판이 강조된다. 주님이 이 세상의 아비와 왕자를 압도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실제로 힘이 어디에 있는 가에 관한 사회적인 재묘사와 관련있는 전체 그룹을 압도하신다. 지배세력인 유대인이나 심지어 빌라도에 의해 부여된 힘이 아니라, 그 힘이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아무도 해할 권세를 가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 진짜 힘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요 19:11).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향해 반대하는 육체적인 대적의 배후에는 사탄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탄은 실제로 사람 안에서 그리고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도록 만들었다(13:2, 27). 아마 가장 잘 알려진 표현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라는 것이다(8:44).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서 배우고 들은 것을 행한다(8:38). 이 방식으로 마귀는 악한 행위와 말의 근원으로 묘사된다. 비록 마귀는 예수님에 대해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고 패배 당해 쫓겨났지만(12:31), 지금부터 마지막 날까지 즉 중간기에 여전히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12:48). 이 이유로 주님은 아버지께서 성도를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도록 기도하셨다. 4.2.3.2 심판 물론 구원의 다른 면은 심판과 사망이다. 이것으로부터 예수님은 사람 혹은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제쳐두고라도 불신자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부터 고생할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단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5. 결론 요한복음의 구원론은 피상적이며 무역사적인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요한 공동체가 모세의 제자들과 직면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구원론적인 표현들은 그 특성에 있어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적인 것이다. 이 이유로 구원론은 특정 문제를 언급하며 그것의 해결을 추구한다. 구원론적인 용어들은 상징적 세계(symbolic world)를 강화하기 위해 발전되었으며 그 결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회적인 응집력을 재확인시킨다. 이것은 요한이 매 상황마다 구원의 이슈를 말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일서에서 분명해 지는 바와 같이 요한은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정결케 한다는 주장을 주저함 없이 말하거나(요일 1:7)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도 언급한다(요일 4:10). 요한일서의 구원론적인 표현은 다른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환언하자면 기독교인이 그릇된 행위와 개인과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발생한 교회내부의 상황에서 개인적인 죄에 대한 질문이 언급된 상황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요한일서의 구원론과 요한복음의 구원론은 상이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다른 상황은 다른 접근을 요하기 때문이다(‘Soteriology i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2002년 프레토리아대학교에서 열린 ‘신약의 구원론 세미나’ 때에 발표된 글로서 저자는 Jan Gabriel van der Watt (D.D., D.Litt. Universiteit van Pretoria)교수의 글을 번역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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