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한국교회는 계속적으로 세상과 극과 극으로 달려가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점점 더 기독교는 비기독교적인 세력들과의 타협점을 잃어버리고,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 진영의 대답은 이렇다.
"원래 기독교는 배타적이다. 진리는 타협할 수 없다. 세상이 기독교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이와 같은 신학을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또한 자신들 역시도 그렇게 배워 왔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이들이 있다면 미국의 선교사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근본주의 신학 노선을 가지고 우 리나라에 복음을 소개했다.
근본주의란 개신교 내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기본적인 주요 교리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교파들 가운데서도 온건한 보수적인 성향의 신앙 노선을 따르는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언제나 정답식의 이야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성향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판단은 항상 성경적이라는 아주 거만하고, 위험천만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의 신학을 이해하려 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아가 필자가 보기에 이들은 점점 더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잃어 가고 있는 듯하다. 즉 세상에서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울부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저 이와 같은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할 뿐이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들도 우리와 같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는 저들을 구원하소서."
필자가 볼 때에 언제나 근본주 의자들은 말뿐이다. 물론 아예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단 이들은 언제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후발자로 출발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아예 출발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미 출발한 이들을 향해서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 일쑤다.
이들은 기독교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일은 교회가 아니어도 세상 내에서 해결이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 벌어진 세상의 그 어떠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궁극적으로는 세상이 해결할 수 없다. 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오직 기독교만이 해결해 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참된 기독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에 대한 육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거기에 기독교의 복음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현 시대에 필요한 참된 복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의 사명이다.
필자는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사회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감상의 집단이 아니다. 기독교는 종교의식을 뛰어넘어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선한 영향력이어야만 한다. 만일 기독교가 이와 같은 측면을 상실해 버렸거나, 아니면 전혀 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효화시키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통 신학이요, 가장 성경적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무효화시키려 하는 이와 같은 모습에 뭐라 할 말이 없다. 세상뿐만 아니라 이제는 기독교 세력과도 소통하려 하지 않는 이들의 고집은 세상뿐만 아니라 진리를 진리로서 받아들이길 소원하는 모든 개혁가들에게는 단단한 여리고성과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기대해 본다. 언젠가부터 여리고성을 돌기 시작한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 가고 있음에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