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위한 좋은 아이디어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법
”짐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세계 미래학계의 대부로 불리는 미국 하와이대 미래학연구소의 짐 데이터(77) 교수가 한국 사회와 중앙SUNDAY 독자를 위해 ‘한국 사회와 미래학’에 관한 기고를 시작합니다.
그는 1967년 미 버지니아공대에서 미국 최초로 ‘미래학 강의’를 개설한 인물입니다.
77년에는 ‘제3의 물결’로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 함께 ‘대안미래연구소(IAF)’를 설립했으며 세계 미래연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세계미래학연맹(WFSF)의 사무총장과 의장을 지냈습니다. 또 지난 40여 년간 하와이대에서 미래학을 가르치며 수많은 미래학자를 배출해 냈습니다.
AFP=본사특약
① 미래학을 한다는 것은
한국이란 나라의 변신은 경이롭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사회를 거쳐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에 근접한 국가는 없었다.
한국은 식민통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하고 가난한 농경사회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은 단기간에 한국을 세계경제를 이끄는 핵심 국가 중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앞서간 서유럽과 북미·일본 등이 걸었던 ‘개발’ 또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미래 이미지를 따른 결과다.
오늘날 한국이 너무도 미래지향적이며, 동시에 스스로 미래를 가꿔가는 국가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현재 또 다른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국 경제가 앞으로도 더욱 성장해 나가길 갈망하겠지만, 한국의 미래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지난 60년간 아주 잘 먹혔던 기존의 ‘개발 모델’이 앞으로도 통할지는 불투명하다.
나는 한국인들의 이런 고민을 덜어주기 미래학을 얘기하고자 한다.
그 첫 회로 무엇이 ‘미래학(futures studies)’인지를 얘기하겠다. 미래학을 ‘예언 과학(predictive science)’이라고 믿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믿는 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미래학은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예언하기 위한 학문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엔 그런 미래학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고 대안을 제시해 보려는 노력 자체가 부질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러한 미래가 올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언(predict)하거나 정확한 미래를 예측(foresight)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대안적인 미래를 구상해 보는 것은 가능하다.
미래학의 본질은 ‘정확히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한 복수의 미래를 구상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가능한 여러 가지 미래를 조사한 뒤 그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미래(desirable future)를 찾아내고, 또 원하는 방향(preferred future)으로 설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설계한 미래 역시 끊임없이 재평가하고 다시 그려야 한다.
미래학자의 주된 역할은 개인과 단체가 저마다 원하는 미래를 설계하고,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간 많은 미래학자가 개발과 실험을 거쳐 적용해보고, 유익하다고 증명한 이론과 방법론이 있다.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고 적용하면, 개인이든 조직이든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생기고 또 자신들이 그린 대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는 계획과 정책은 쓸모없거나 심지어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50년 가까이 미래학을 가르치고 연구해왔다. 그 과정에서 미래와 미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이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좀 장난스러울지 모르지만 이것들을 ‘데이터의 미래법칙’이라고 이름 지어봤다.
그 첫째는 ‘미래는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래학이란 ‘미래’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미래의 이미지’ 혹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미래 이미지란 아주 안정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사건이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매우 쉽게 바뀌는 것도 있다.
다시 말해 미래학은 개인 또는 사회가 특정의 미래 이미지를 갖게 된 원인은 무엇이고, 이러한 서로 다른 미래의 이미지들이 현재의 그들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러한 행동들이 미래의 어떤 특정 상황을 견인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둘째, 미래법칙은 ‘미래에 관한 어떤 유용한 생각도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행동양식과 가치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기존 기술에 기반한 가치와 신념과는 맞지 않다. 새로운 것은 처음엔 당황스럽고 실현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쓸데없는 공상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것들에 우리는 곧 친숙해지고, 트렌드로 발전해 결국 평범한 것이 되었다가 소멸한다. 반대로 대중이 가장 그럴싸한 미래라고 여기는 것들은 종종 아주 가능성 없는 미래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진정으로 미래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원한다면, 전통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충격적이며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각오해야 한다. 물론 미래학자들은 적절한 증거를 이용해 가능한 대안적 시나리오를 짜내야 한다. 초기의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를 그럴듯하고(plausible) 실천 가능하게(actionable) 만들어내야 할 책임이 있다.
마지막 법칙은 “우리가 도구를 만들어 내지만 그 후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미래학자 겸 미디어 철학자인 마셜 맥루한이 말한 이 명언은 기술의 변화가 사회와 환경 변화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다양한 대안적 미래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이다. 물론 기술이 사회 변화 요소의 전부는 아니다. 인구의 크기와 분포, 환경 변화, 경제이론과 행위, 문화적 신념과 습관, 정치적 구조와 결정, 그리고 개인의 선택과 행동과 같은 것도 미래를 창조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새 장난감에 빠진 아이처럼 기술에만 탐닉하면 곤란”
짐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②기술이 바꿔놓은 미래
나는 지난 호에서 인류가 이제 더 이상은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물론 의사 결정권자(decision maker)들은 예언 가능한 세상을 원한다.
또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큰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부도덕한, 또는 자신도 잘못 알고 있는 많은 자들이 어수룩한 사람들에게 특정한 한 가지의 미래를 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안적인 미래상들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선호하는 미래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어떤 힘들이 세상을 바꾸는지에 대한 관점, 즉 사회 안정과 변화에 대한 엄격한 이론이 필수적이다. 이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미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일부 사람은 사회변동이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영리하게도 특정한 미래 시점에 A란 사건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떠들지만, 그런 미래 예측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어떻게 골라냈고, 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지 이론적 배경까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래 전문가에게는 먼저, 어떤 사회변동이론을 쓰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만약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하다”거나 “그건 기업 비밀”이라고 답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낫다.
이론적 근거 없이 경험이나 직관으로만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 만약 어떤 미래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주 바꾼다면 의심해볼 만하다. 이들은 종종 의심의 여지없이 A라는 미래가 일어날 것이라고 떠들다가도, 하루아침에 어떤 설명도 없이 B라는 미래를 확신한다며 떠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은 많다.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고 최고의 강연료를 받는 많은 사람이 이상하게도 그들의 이야기를 하루아침에 바꿔버린다. 어느 날은 세상이 생기가 없다고 했다가, 다음 날에는 뜨겁고 붐비고 있다고 말을 바꾼다. 이들은 절대적인 확신을 갖고 두 가지의 모순된 주장을 한다. 이야기가 달라졌다면 솔직히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 이상한 것은 강연료를 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한마디의 사과도 없이, 처음 말할 때처럼 똑같은 확신과 권위를 바탕으로 고액의 강연료를 챙기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전문가들에게 얼마나 논리적인 이론을 활용해 논리적인 예측을 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선택할 수 있는 이론들은 많다. 인간의 능력보다 한계를 강조하는 이론,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는 이론, 혹은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이론, 반대로 인간은 무기력하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나는 기술이 사회와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요 요인임을 주장하는 이론을 주목한다.
묘하게도 기술은 사회ㆍ환경적 변화의 과정에 개입하거나, 변화를 더욱 촉진시켰다가도, 나중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세상에서 잊혀지기도 한다. 예컨대 20세기 어떤 기술들은 가파른 인구 증가의 디딤돌이 됐음에도, 인구 증가 그 자체가 사회·환경적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기술이란 ‘인류가 일을 하는 모든 방식’인데, 이 정의는 ‘사람’을 강조하며, ‘무엇을’만이 아닌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고, 통제할 수 없는 망나니도 아니다. 오히려 인류는 기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더욱 인간답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되묻고 변형시켰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고 적절한 미래를 내다보자면 기술을 변화시키는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해야 한다.
이런 과정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마셜 맥루언의 명언(“우리가 도구를 만들어내지만 그 후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도구를 만드는 주체이지만, 그 ‘도구’는 우리의 사회 환경을 예기치 못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킨다. 미래학자로서 내가 수행하는 연구는 과거에 기술이 어떻게 인류의 행동을 변화시켰는지, 그 역사적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다. 또 기술의 영향력이 문화와 지역이 다른 곳에선 어떻게 달라지는지, 어떤 새로운 기술이 어느 연구소에서 개발되고 있는지, 그 기술은 앞으로 인류의 행동을 어떻게 바꿔나갈지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기술은 물리적·생물학적·사회적 기술로 나눌 수 있다.
펜·컴퓨터·비행기가 물리적 기술이라면, 음식을 먹고 자손을 낳고 땀을 흘리며 체온을 조절하는 것은 생물학적 기술이다. 가족·학교·직장·자본주의 등 집단과 제도는 사회적 기술이다. 사회 변화와 충돌은 물리적 기술이 생물학적 기술이나 사회적 기술을 위협하거나 대체할 때 전형적으로 발생했다. 예컨대 생명공학(BT)의 발전으로 성적 접촉 없이도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됐고, 첨단 정보기술(IT)이 나오면서 학교나 도서관이 가상공간으로 대체됐다.
하드웨어·소프트웨어와 오그웨어(org ware)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도 기술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그웨어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생산·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구조와 물리적 절차를 말한다. 펜을 예로 들어보자. 글쓰기·문법, 펜을 쥐는 법 등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지 않으면 펜이라는 하드웨어의 의미는 사라진다. 더 나아가 펜은 글쓰기·학교 등을 만들어내는 인류 체제, 즉 오그웨어에 의존하게 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유지하고, 바꾸는 사람의 역할을 빼놓고 사회 변화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지난 수백 년간 서구문명의 확산으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기술 개발을 적극 장려하는 세상에서 살게 됐다.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고 널리 퍼지면서 인류의 진화 속도는 점점 더 가속화하는 중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기술은 인간의 행위와 신념ㆍ제도만 바꿔놓은 게 아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생존의 기반으로 의존해 왔던 순수한 자연은 대부분 사라지고, 인공적인 환경으로 대체되고 있다. 기술에 탐닉하다 보니,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이 불확실한 상태에 놓인 것이다.
인류가 계속 생존하기 위해서는, 진화를 조절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신기한 새 장난감에 푹 빠진 어린아이처럼 기술에만 탐닉하는 것에서 멈춰야 한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인류가 직면한 최대 과제다.
번역=하와이 미래학 연구소
계속 성장하는 미래, 맹목적으로 믿다간 큰 코 다쳐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③네 가지 미래
지난번 글에서 나는 미래학이 ‘미래’를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미래는 실증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학이 수행하는 과제 중 하나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의 이미지를 확인하고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현 사회의 문제를 풀어낼 대안이 될 수 있고, 토론 대상으로 열려 있으며, 삶의 투쟁과 희망을 반영한다. 미래는 필연적이지도 않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따라야 하는 무기력한 시공간도 아니다.
사실 미래에 대한 이미지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람들의 미래 이미지는 아주 단순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 수렵과 채집으로 생존했던 어느 조그만 부락에서 당신이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매일 열매를 모으거나 사냥을 하러 나갈 것이다. 이들에게 미래는 ‘나중에 다시 반복될’ 현재였다. ‘내일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농경사회가 도래했다. 인류는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햇빛을 받아 키우며, 가을에 추수하고, 그 곡식으로 겨울을 지내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시대에 미래의 이미지는 성장·쇠퇴·회복의 순환고리를 돌고 도는 것이었다. 너무 좋지도 너무 나쁘지도 않은, 너무 부유하지도 너무 가난하지도 않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만 미래가 변동한다는 시각을 갖게 됐다. 지금은 어려워도 참고 견디다 보면 따듯한 봄날이 찾아온다는 순환적 미래관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가 깊다.
‘평평한’ 그리고 ‘순환하는’ 미래 이미지에 이어 ‘될 대로 되라(Que sera, sera)’는 미래관도 있다. 미래는 신(神)의 영역이기에 앞날을 걱정하는 것은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성경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 것이요,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마태복음 6:34)이라고 조언한다. 물론 여기서 언급한 성경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될 대로 되라는 미래의 이미지에는 미래란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렇듯 세 가지의 미래 이미지만 갖고 있던 인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300여 년 전,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고 열린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비밀 공식’을 발견한 것처럼 환희에 들떴다. 진보·발전·성장이란 단어를 써 가며 인류는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래서 과거와는 단절된 미래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의 미래, 산업자본주의의 미래였고 1940년대 후반부터 한국을 이끌어 온 미래이기도 했다.
성장의 미래는 사실상 세계로부터 공인된 미래의 이미지다. 어떤 사회나 기업도 성장의 미래만 추구한다는 뜻에서다.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소멸을 의미한다.
출산율이 떨어지면, 소득이 낮아지면, 소비가 감소하면 그건 비극이라는 얘기다. 설사 성장률이 다소 주춤하더라도 반드시 반전시켜 다시 성장 궤도로 진입해야 한다는, ‘지속 성장의 이미지’는 그래서 다른 대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영원한 성장은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끊임없이 경제적인 성장을 추구하다 보면 또 다른 성장의 기회를 놓칠 수 있고, 게다가 삶의 기쁨마저 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무한 성장론자들 탓에 환경 파괴, 세계적 기근과 핵전쟁의 위험, 에너지 고갈로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한 상태로 접어들었음을 경고하고 있다. 경제나 환경뿐 아니라 도덕마저 붕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증가하면서 ‘미래는 붕괴된다’는 이미지가 점차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이런 심각한 문제들에 공감하면서도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우선 무자비한 성장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지속 가능한 사회, 공정한 사회, 평온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침체된 사회가 아닌 지적인 사회, 정신적인 성장도 도모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평온한 사회를 만들자는 게 세 번째 미래 이미지에 담겨 있다. 이런 이미지는 ‘생존(혹은 절제된) 사회’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어떤 사람들은 붕괴처럼 보이는 게 사실은 새로운 사회로 변화돼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오래된 삶의 방식이 사라지고 전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급속히 이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 전에 없던 지성의 등장, 달이나 화성 혹은 해저 등 새로운 삶의 공간이 창조되면서 인류는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 21세기는 이전의 어떤 시공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의 급물살을 탈 것이다.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과학자인 래이 커즈와일이 ‘특이점(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이라고 부른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빠르게 이동 중이다. 나는 이런 사회를 ‘변형사회’라고 표현한다.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인류는 첨단 기술로 새롭고 눈부신 창조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순간에 서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네 가지의 미래는 책상 위에서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라 실증적·경험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꽤 오래전, 미래학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다양한 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연구했다. 정부의 정책 보고서나 기업의 전략 기획서뿐 아니라 소설·영화·광고·에세이 등에서 인류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변화시키는 미래의 이미지들을 찾아봤다.
방대한 미래의 이미지들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자칫 다양한 미래의 이미지가 주는 풍부한 메시지나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소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네 가지의 미래(지속성장, 붕괴, 생존, 변형)와 적어도 하나 이상 겹치게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네 가지 미래는 미래학에서 ‘연역적 예측’으로 불리는 방법론의 기초로 사용된다. 네 가지의 일반적인 미래의 이미지로부터 현재의 시간으로 소급 적용해 들어가면 현재가 달리 보이게 된다.
예컨대 ‘가족’의 미래를 지속 성장의 이미지로 놓고 볼 때와 붕괴나 생존 혹은 변형의 미래 이미지로 놓고 볼 때 아주 달라진다. 이를 통해 가족의 미래에 대해 유용하고도 일관성 있는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네 가지 미래 중 어느 하나의 미래가 더 가능성이 있다거나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네 가지 미래는 모두 실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나름대로 존재가치가 있다.
변화의 쓰나미에 올라타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창조하려면 네 가지 미래를 모두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미래를 한 가지 유형에 걸지 말아야 한다. 특히 미래는 지속 성장할 수 있다고 맹목적으로 믿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다 큰코다친 것이 엊그제 일이다.
번역=하와이 미래학연구소
'생활의 유익 > 미래학, 미래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평] 세계적인 미래학자 10인이 말하는 미래혁명 (신지은 외 4인,일송북) (0) | 2011.10.17 |
---|---|
[스크랩]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4.5.6 (0) | 2011.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