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유익/미래학, 미래세계

[스크랩]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4.5.6

잔잔한 시냇가 2011. 3. 7. 10:34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④미래학 방법론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미래학 서적이 출간되고, 미래를 예측하는 활동이 빈번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어떤 미래학 방법론이 적절한지 검토하지 않은 채, 바로 ‘본론으로 뛰어드는’ 조급증이 엿보인다.

이런 배경에는 통계를 이용한 양적 방법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반면 참여 관찰이나 인터뷰 등을 이용한 질적 방법론은 주관적이고, 그래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간주한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때때로 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이 후원하는 강좌에서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양적 방법론을 가르쳤다. 일반 통계뿐 아니라 컴퓨터 모델링에도 한동안 푹 빠진 적이 있다. 초기 미래학자들은 양적 방법론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칠수록 대부분의 양적 방법론이 그다지 쓸모가 없을뿐더러 지나치게 사실을 오도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됐다.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데, 숫자로 표현되는 양적 방법론은 마치 우리가 흔들림 없는 정확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물론 양적 방법론의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유용성은 예컨대 컴퓨터 모델링 연구자가 스스로 가정한 것들을 좀 더 분명하게 범주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미래를 예측할 때 연구자들은 때로 상당히 모호한 말들을 어지럽게 늘어놓는데, 수학적 연산에 기반을 둔 양적 방법론은 이런 모호함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학에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할까. 나는 오랫동안 이머징 이슈(emerging issue) 분석법이 유용하다고 믿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이 미래를 예측할 때 사용하는 트렌드(trend) 분석과 다르다.

트렌드 분석은 현재의 흐름을 형성하는 어떤 요소를 찾아내, 그것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되짚어본 뒤, 발전의 속도를 감안하면서, 그 요소가 미래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과거의 어떤 흐름이 미래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그에 따라 미래사회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트렌드는 대부분 지속되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트렌드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꼭 등장하게 마련이다.

이렇듯 트렌드가 지속되지 못하는 이유는 예상치 못한 사건, 즉 이머징 이슈 때문이다. 따라서 이머징 이슈를 분석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 50년 넘게 미래학계에서 공공정책과 그 정책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면서 이머징 이슈 분석법을 연구한 몰리터(Graham Molitor)의 관점을 따라가 보자.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들은 과거엔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혹은 걱정하는, 트위터나 블로그ㆍ토크쇼 등에서 논의되는 문제들 또는 국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설 주제들은 예전엔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의 기술, 사회제도, 종교적 신념, 정치적 이념, 질병, 전대미문의 사건 등도 그렇다.

이런 현대의 문제들(혹은 기회)은 과거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혹 몇 명이 트위터 같은 곳에서 조심스럽게 떠들었는지 모르지만 설사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괴짜들이 떠벌리는 망상쯤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명은 이런 ‘괴짜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아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따돌림 받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일 수 있다. 노숙자ㆍ마약중독자ㆍ범죄자, 혹은 대학 교수들일 수도 있다. 마침내 몇몇 대학 교수들이 이들의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아채고, 강의실에서 그 사실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교수들이 하는 말을 무시한 지 오래됐지만, 주위 동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혹은 블로그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글을 쓰고, 떠들기 시작한다. 식자층의 의견을 대변하는 저널에서도 이 사실을 다루고, 인기 없는 지상파 라디오 방송에서도 지나가는 말로 이런 사실이 보도된다.

이 사실이 뉴욕 타임스에 조그마한 기사로 취급되고, 샌프란시스코의 지상파 TV 방송국이 토크쇼를 제작한다. 그러자 주변 방송국들이 추가 보도에 나서고, 급기야 샌프란시스코의 저명한 신문 ‘클로니클’이 주요 기사로 보도한다. 이번엔 학계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춰 연구에 나서고 이에 관련된 학술회의가 개최된다. 마침내 미국 전역을 커버하는 TV 방송국과 신문사에 이런 사실이 언급된다. 이제 이 주제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대륙을 휩쓰는 주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다. 어느새 열광적인 유행은 지나가고 사람들은 이 사실에 익숙해진다. 어린이들은 이런 사실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환경에서 자라나고 이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로 여긴다. 머지않아 이 일은 사라진다. 누구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찌 보면 신기루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발단해 어떤 일 때문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또 어떤 사건 때문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초기 사건 분석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트렌드 분석은 이미 잘 진행되고 있는 일들, 이를테면 초기에 나타난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거의 일상이 되기 직전의 것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트렌드 분석은 예측이 가능한, 이미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추적이 가능한 일들을 주목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머징 이슈 분석법은 가능한 한 첫 주목을 받은 시점부터 관심을 둔다. 이를 탐지하려면 괴짜 과학자, 사회의 주변 인물, 엉뚱한 출판물이나 웹사이트, 예술가나 시인 또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나는 ‘데이터의 미래학 제2법칙’을 언급하면서 미래에 유용한 아이디어는 처음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미래학자가 미래에 관해 떠들 때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안 된다”고 반응한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다. 그러나 트렌드에 대해 말하면 “나도 들어봤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만약 남들로부터 엉터리라는 평가를 받는 아이디어를 들었다면 그건 이머징 이슈일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미래 준비 안 하면 세상은 기업의 식민지 된다”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

 

 

 

 

⑤정부와 미래학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부는 200년도 더 된 세계관이나 기술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18세기 말 서유럽과 북미가 농업사회였을 때의 철학·우주론·가치관을 건국이념과 근본조직의 틀로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때 이후 기업과 가족·종교, 기타 다른 조직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변화해왔다. 하지만 유독 정부조직은 그 시절 수준으로 뒤떨어져 남아 있다.

미국 정부는 산업화 시대 이전에 설립됐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1787∼1789년 헌법을 만들기 위해 모였던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지만, 인구 3만 명이 채 못 됐다. 뉴욕도 겨우 3만 명, 보스턴은 2만 명도 안 됐다. 미국 전체 인구는 300만 명이었고, 동부 13개 주에 띄엄띄엄 떨어져 살고 있었다.

그런 미국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역 간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미합중국의 13개 주는 제대로 된 도로 체계나 교통·통신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연방주의와 양원제·권력분립·선거인단 구성 등은 이런 물리적·지리적 도전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정치 체제는 첨단기술이 넘쳐나는 21세기에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

미국과 달리 근대 일본 정부는 산업화가 진행되는 시기에 태어났다. 그러나 전통적인 일본 통치제도를 현대화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현대적 우주론과 기술론에 입각해서 일본 정부 제도를 재창설해 보려는 시도도 아직까지 없다. 일본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입헌주의에 입각한 낡은 산업화 이전의 가정들에 바탕을 둔 제도를 지금도 적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때도 기존 제도의 틀을 바꾸지는 않았다.

1990년 공산국가가 붕괴하면서 동유럽 국가를 포함한 여러 나라가 정부를 새로 설계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낡은 정부 형태가 별 생각 없이 적용됐다. 지금의 유럽도 마찬가지다. 유럽 연방은 헌법을 제정할 때 진화된 우주론과 기술론에 입각한 통치 구조를 창조해보려는 뚜렷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왜 변화하지 않을까. 19세기 후반 이후 미국·일본·독일·한국 등은 오직 하나의 미래를 위해 존재했다. 경제성장이다. 정부와 교육, 매스미디어와 가족, 그리고 심지어 종교까지도 성장을 거듭하는 국가와 경제를 따라잡을 국민을 양산해 내는 것이 목표였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해 풍성해지는 그런 세계를 꿈꿨다.

한국은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앞서간 국가를 모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한국도 할 수 있었다. 경제발전에 관한 새로운 유행이나 선호가 생기면, 그것들을 따라 할 새 정책과 기관이 정부 안에 만들어졌다.

모방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겠지만, 특별히 어려운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끊임없이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만 있으면 됐다. 그러나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닥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다.

1960년대에 들어 일부 학자는 사회적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부가 미래를 조망하는 기관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프랑스의 베르트랑 드 주브넬은 ‘예측 공개토론위원회’란 공공기관 창설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다방면의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하고 공개 토론하는 기반이 마련됐다. 또 노르웨이·오스트리아·이탈리아·스코틀랜드·헝가리·네덜란드·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소련 출신의 미래학자들은 정부가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1965년 ‘인류 2000’이라는 연구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세계미래학연맹(WFSF)의 모태가 된다.

이 즈음 미국의 앨빈 토플러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미래’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토플러는 “사회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가 아닌 미래에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베스트셀러인 미래의 충격(future shock)은 이 글을 토대로 쓴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미래지향적 민주주의(Anticipatory Democracy)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부의 형태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후 세계 몇몇 국가가 정부 조직 안에 미래를 연구하는 기관을 만들었다. 1970년대에 스웨덴은 총리실 산하에 미래사무국을 뒀다. 이 기관은 80년대에 정부에서 떨어져 나와 민간 싱크탱크의 역할을 하게 됐다. 네덜란드에서는 정부정책과학위원회가 정부에 최첨단 미래 정보들을 제공했다. 80년 뉴질랜드에서 국가미래위원회가 창설됐다.

영국은 사업혁신기술부 산하의 정부과학위원회에서 미래예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미래예측을 바탕으로 여러 미래에 관한 연구를 통합하고 있다. 93년 설립된 핀란드 의회의 미래상임위원회는 장기적인 문제점에 대한 정부의 제안을 평가하고 대안을 내놓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핀란드 문화교육부는 92년 학술원의 지원을 받아 터쿠 대학에 미래연구센터를 설립했고, 17개의 핀란드 대학들은 다양한 미래 연구를 수행하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보고 싶다. 만약 기업은 미래예측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정부는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새로운 기업 식민지의 위험 속에 살게 될 것이다. 공간이 아닌 시간의 식민지 말이다. 일반 대중과 정부 관료들의 미래 선택은 이미 기업의 관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로 점점 좁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적어도 기업이 하는 수준만큼이라도 미래연구를 해야 한다. 더욱이 정부의 미래예측은 경제·과학·기술 혹은 국방안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인권 등 보다 폭넓고 전반적인 문제를 다뤄야 한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 바로 모든 정부 조직에 ‘대안적 미래예측과 바람직한 미래 설계’라는 미래예측의 기능을 심어넣을 때다. 사실 제일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전면적으로 다시 계획하고, 정부를 다시 디자인하는 그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더 좋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면 기존의 낡은 조직체 위에 단지 몇몇 효과적인 대안적 미래예측 부서를 첨가하는 것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미래의 기습 막아라” … 한국도 60년대부터 미래학 연구

 

짐 데이터의 미래학 이야기<끝>

 

 

199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미래학연맹(WFSF) 콘퍼런스에서 짐 데이터 교수가 남북한 미래학자들을 만났다. 가운데가 숭실대 전득주 교수, 맨 왼쪽은 자신을 김정일의 육촌이라고 소개한 북한 사회과학자 김정민이다. 사진=전득주 교수 제공

 

 

⑥한국인과 나 그리고 미래학


미래학은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미래사회(WFS)가 66년, 유럽과 제3세계가 주축이 된 세계미래학연맹(WFSF)이 73년 설립됐다. 대중에게 미래학의 붐을 일으킨 앨빈 토플러의 저서 미래의 충격(future shock)도 이즈음(70년) 출간됐다.

199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미래학연맹(WFSF) 콘퍼런스에서 짐 데이터 교수가 남북한 미래학자들을 만났다. 가운데가 숭실대 전득주 교수, 맨 왼쪽은 자신을 김정일의 육촌이라고 소개한 북한 사회과학자 김정민이다. 사진=전득주 교수 제공

그 시절 한국의 미래학 현황은 어떠했으며 어떤 미래학자들이 있었나.

한국의 미래학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서구에서 미래학이 피어나던 그때 한국에서도 미래학이 움트고 있었다. 한국 미래학자와 나의 첫 만남은 내가 하와이대 교수로 부임한 직후인 69년에 이뤄졌다. 당시 나는 막 출범한 ‘서기 2000년 하와이를 위한 주지사 위원회’와 일을 시작했다. 하와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바라는 30년 뒤 하와이의 모습을 그려보는 작업이었다. 이 행사는 와이키키 끝자락 일리카이 호텔에서 열린 대규모 콘퍼런스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국제적인 미래학자 네 사람을 초빙해 우리가 한 것을 보여주고 평가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당시 서울대 행정대학원 학장을 지내고 호놀룰루의 동서기술발전연구소장으로 와 있던 이한빈(전 경제부총리· 2004년 작고)씨였다.

이한빈씨는 한국미래학회의 창립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하와이 2000콘퍼런스에 참가한 직후 동서문화센터의 아시아 개발과 관련한 콘퍼런스를 조직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래에 대한 관심이 하와이에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70년 4월 일본의 대표적 미래학자 하야시 유지로가 세계 각지의 미래학자를 모아 교토에서 콘퍼런스를 열었다. 하와이에서는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 한국에서는 이한빈·최정호(78)·최형섭(2004년 작고)·손정목(83·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씨 네 사람이 참여했다.

최정호씨는 한국일보 기자였고, 손정목씨는 중앙공무원교육원 교관이었다. 최형섭씨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이었다. 그는 65년 존슨 미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발전에 유용한 과학기술 분야의 미래 기반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KIST라고 설명했다.

교토 콘퍼런스에서 이한빈씨는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한국미래학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문·사회·자연과학·정부·기업·언론에 이르는 분야에서 35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회의 목적은 ‘미래로부터 기습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의 미래 고민은 일반적인 개발(development)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건 중요한 얘기다.

당시 한국에서 미래란 국가 발전 목표와 연결돼 있었다. 하지만 미래학자들은 특히 발전의 사회·윤리적 영향을 이해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KIST가 전적으로 과학기술에 초점을 맞췄던 것과는 달리, 한국미래학회는 인간·환경과 같은 이슈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한빈씨와 다른 한국의 미래학자들은 허먼 칸(미국의 미래학자)이 60년대 후반 추진한 ‘서기 2000년(The Year 2000)’ 프로젝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칸은 ‘서기 2000년’ 프로젝트를 세계에 전파했다. 가장 잘 알려진 곳은 일본이다. 일본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더 영향력 있었던 것이 68년 칸이 한국에서 진행한 ‘서기 2000년’ 작업이다. 이 프로젝트는 71년 ‘서기 2000년의 한국(Korea in the Year 2000)’이라는 한국 정부의 공식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칸이 옹호한 ‘발전’과 ‘지속 성장’ 이라는 미래 이미지에 기초를 두고, 2000년까지 한국의 인구·경제·과학·기술·사회환경·윤리 등의 분야에서 일어날 법한 변화를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한빈씨는 79년 말 ‘서울의 봄’이 오면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올라 그의 미래연구를 정부 정책에 반영할 기회를 갖게 됐지만, 신군부의 등장으로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미래학을 통한 나와 한국인들의 두 번째 만남은 7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 하와이대 동료인 새뮤얼 리 박사는 회계학 교수였다. 그는 한국인 그룹이 미국의 순회 강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와이는 이런 한국인 방문자들이 처음이나 혹은 마지막으로 들르는 장소였다. 새뮤얼은 하와이 강좌 중 한 부분인 미래학 강의를 나에게 부탁했다. 첫 번째 강의는 77년이었고 그 후로도 그가 급작스레 세상을 뜨기(99년) 전까지 매년 한국인들에게 미래학 강의를 했다. 80년 10월 나는 새뮤얼의 주선으로 처음 한국을 찾았다.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미래전략연구원(KIFS) 주최 콘퍼런스에서 미래학을 강의하고 부산 동아대도 찾았다. 또 당시 대법원장과 전직 국무총리 한 사람을 만났다.

80년에는 유재호(78·전 덕성여대 교수) 박사가 호놀룰루에 아시아·태평양교류연구원(CAPE)을 설립했다. 나는 이 연구원에서 최근까지도 미국의 미래 등 미래를 주제로 한 다양한 강의를 했다. 참석자는 대부분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난 35년간 새뮤얼과 유재호 박사의 방문 학생들과 교류를 통해 한국인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인 미래학자들과의 세 번째 만남은 87년 숭실대 전득주(70) 교수가 하와이대 초빙 교수로 초청되면서 이뤄졌다. 그는 나와 여러 차례 만나면서 한국에서 미래학을 부흥시키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됐다. 87년 WFSF의 회원이 되었고 이듬해 한국미래연구학회를 만들었다.

북한과의 인연도 있었다. 내가 WFSF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던 88년 북한이 베이징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리고 다음 해 12월 나는 황장엽씨와 조선사회과학협회·주체사상연구소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나는 두 기관에서 온 학자들의 강연을 듣고, 김일성대학의 철학 교수들에게 강연했다. 한국의 미래연구학회와 북한의 사회과학협회 회원들은 평양과 서울이 함께하는 WFSF 지역 콘퍼런스를 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 모든 과정은 주로 전 교수를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WFSF 모임은 불행히도 열리지 못했다.

나의 네 번째 한국인 미래학자와의 만남은 김태창(현 일본 공공철학공동연구소장) 박사와의 인연이다. 김 박사는 88년 베이징 콘퍼런스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다. 그 후 나는 그를 89년 7월 호놀룰루에서 만났다. 그는 90년 부다페스트, 그리고 91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WFSF 세계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92년 12월 나는 그가 사회대 학장으로 있던 충북대에 초청돼 강연을 했다. 김 박사와 함께한 나의 주요 연구는 그가 일본 ‘장래세대 종합연구소’와 진행한 것이었다. 94년부터 99년까지 연구소는 미래 세대에 대한 현재 세대의 책임을 주제로 세계 각지에서 콘퍼런스를 열었다. 나도 그중 몇몇 모임에 참여했다. 김 박사와 나는 미래 세대에 대한 저명한 학자들의 글을 모아 두 권의 책을 만들어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새로운 역사 창조하기(Creating a new history for future generations)미래 세대를 위한 공공철학 창조(Co-creating a public philosophy for future generations가 그것이다.

‘미래 세대’라는 개념은 60년대와 70년대 처음 사용된 이후 미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였다. 미래 세대 연구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단순히 우리의 아이들이나 손자, 다른 사람들이 아닌 모든 생명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의무를 이해하고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수천 년 내의 윤리학·철학에서 가장 놀라운 변화 중 하나다. 나에게 필수적 관점을 소개해준 김 박사에게 깊이 감사하고 있다.

최근 나는 박영숙 유엔미래포럼 대표와 밀레니엄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과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박 대표는 뛰어난 활력과 지성,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 덕분에 2006년 이후로 1년에 몇 차례씩 정부·기업·교육과 관련된 많은 사람과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미래학 워크숍을 열었다. 나와 같이 미래, 미래학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박 대표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는 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외국의 미래학자를 한국으로 초청하고 미래학이 한국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나와 한국, 한국의 미래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이 있다. 나는 70년 이후로 하와이대에서 많은 한국 대학원생의 석·박사 학위 논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들 모두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한국과 세계에서 중요한 리더가 될 것이다.

연재를 마감하며 다시 한번 제안한다.

지난 세월 동안 비록 성과가 좋았다 할지라도 ‘개발’이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하나의 미래 이미지만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대신 ‘대안적인 미래’의 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모든 정부기관과 경제·교육 분야에서 대안적 미래 이론과 방법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현재가 아닌 오로지 미래만을 연구하는 상설 조직을 만들어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유익한 미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박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과정에 대안적 미래 이론과 방법론을 집어넣어야 한다. 모든 시민이 대안적 미래에 기반을 두고 예측·계획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며 효율적인 의사결정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번역=하와이 미래학연구소

 

 

 

 

중앙SUNDAY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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