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에 관한 시 모음> 도종환의 시 '담쟁이' 외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시인, 1954-)
+ 담쟁이
담쟁이는 벽을 평지로 알고 산다 담쟁이는 벽을 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끝 절망의 벼랑과 만난다 벽을 놓지 못한 채 제 한 몸 던져 끝끝내 매달려 있는 담쟁이의 벽 하늘에 목숨을 맡긴 채 평지 끝 절망의 벼랑에서 고공투쟁하는 벼랑 끝 절망이 담쟁이의 희망이다 (강상기·시인, 1946-)
+ 담쟁이덩굴
비좁은 담벼락을 촘촘히 메우고도 줄기끼리 겹치는 법이 없다.
몸싸움 한 번 없이 오순도순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진초록 잎사귀로 눈물을 닦아주고 서로에게 믿음이 되어주는 저 초록의 평화를
무서운 태풍도 세찬 바람도 어쩌지 못한다. (공재동·시인이며 아동문학가)
+ 담쟁이덩굴의 독법
손끝으로 점자를 읽는 맹인이 저랬던가 붉은 벽돌을 완독해 보겠다고 지문이 닳도록 아픈 독법으로 기어오른다 한번에 다 읽지는 못하고 지난해 읽다만 곳이 어디였더라 매번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다 보면 여러 번 손닿는 곳은 달달 외우기도 하겠다 세상을 등지고 읽기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그랬듯이 등 뒤 세상은 점점 멀어져 올려다보기에도 아찔한 거리다 푸른 손끝에 피멍이 들고 시들어버릴 때쯤엔 다음 구절이 궁금하여도 그쯤에선 책을 덮어야겠지 아픔도 씻는 듯 가시는 새봄이 오면 지붕까지는 독파해 볼 양으로 맨 처음부터 다시 더듬어 읽기 시작하겠지 (나혜경·시인, 1964-)
+ 담쟁이 넝쿨
김과장이 담벼락에 붙어있다 이부장도 담벼락에 붙어있다 서상무도 권이사도 박대리도 한주임도 모두 담벼락에 붙어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밀리지 않으려고 납작 엎드려 사력을 다해 견뎌내는 저 손 때로 바람채찍이 손등을 때려도 무릎팍 가슴팍 깨져도 맨손으로 암벽을 타듯이 엉키고 밀어내고 파고들며 올라가는 저 생존력
모두가 그렇게 붙어 있는 것이다 이 건물 저 건물 이 빌딩 저 빌딩 수많은 담벼락에 빽빽하게 붙어 눈물나게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대웅·시인, 1962-)
+ 담쟁이 사랑
끝없이 타오르는 도벽 같은 탐욕으로
남몰래 담을 타며 밤마다 모의한다
하늘이 내린 형벌이다 중독이다 전염이다
그대 집 다 메워도 그대 맘 곁에 못 가
혹독한 추위에 몸이 얼고 생각이 얼고
기어이 가슴 하나 남긴 채 전설 속에 사라진다
여느 해 그러하듯 여름 가고 가을 오면
움츠린 몸 뒤척이며 피가 먼저 나선다
그래도 그 흔한 사랑이라 차마 말 못한다 (이민화·시인, 1966-)
+ 담쟁이 덩굴
두 손이 바들거려요 그렇다고 허공을 잡을 수 없잖아요 누치를 끌어올리는 그물처럼 우리도 서로를 엮어 보아요 뼈가 없는 것들은 무엇이든 잡아야 일어선다는데 사흘 밤낮 찬바람에 찧어낸 풀실로 맨 몸을 친친 감아요 그나마 담벼락이, 그나마 나무가, 그나마 바위가, 그나마 꽃이 그나마 비빌 언덕이니 얼마나 좋아요 당신과 내가 맞잡은 풀실이 나무의 움막을 짜고 벽의 이불을 짜고 꽃의 치마를 짜다 먼저랄 것 없이 바늘 코를 놓을 수도 있겠지요 올실 풀려나간 구멍으로 쫓아 들던 날실이 숯덩이만한 매듭을 짓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벌레 먹힌 이력을 서로에게 남기거나 바람이 먼지를 엎질러 숭숭 뜯기고 얼룩지기도 하겠지만 그래요, 혼자서는 팽팽할 수 없어 엉켜 사는 거예요 찢긴 구멍으로 달빛이 빠져나가도 우리 신경 쓰지 말아요 반듯하게 깎아놓은 계단도, 숨 고를 의자도 없는 매일 한 타래씩 올을 풀어 벽을 타고 오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요 오르다 보면 담벼락 어딘가에 평지 하나 있을지 모르잖아요. 혹여, 허공을 붙잡고 사는 마법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요 따박따박 날갯짓하는 나비 한 마리 등에 앉았네요 자, 손을 잡고 조심조심 올라가요 한참을 휘감다 돌아설 그때도 곁에 있을 당신 (조원·시인, 19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