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신 과정이다.
첫 번째는 생명나무이고, 두 번째는 만나이고, 세 번째는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나를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면 영생은 무엇인가?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생이라는 말은 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영생이시라는 말이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다.
영생한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 안에서 산다는 말이다.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다.
인격적인 문제이고 질적인 문제이다.
하나님이 영생이시니까 내가 영생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 산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말이다.
내가 하나님의 표현으로 산다는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우리는 그 영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생이시고, 우리의 영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한다는 말은 영생을 살아낸다는 뜻이다.
영생을 살아내려면 그분이 내 속의 성분이 되어야만 살아낼 것이 아닌가.
내 속에 성분되신 그분을 살아내는 것이 영생을 살아내는 것이다.
영생에 대해서 개념을 바꿔야 한다.
영생이라는 것은 오래오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요한일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생이시라”고 했다.
영생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영생이시니까 우리가 영생한다는 말은 하나님으로 산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양식으로 산다, 하나님을 내 성분으로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라는 성분 때문에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개하고 우리가 다른 것은, 우리는 개고기하고는 다르다.
그래서 개는 개 대로 살고 소는 소대로 산다.
소는 왜 소인가? 소고기하고 개고기하고 다르다. 소는 음매하고 운다.
개는 왜 멍멍하고 짓는가? 개고기가 그렇게 생겨서 멍멍하고 짓는 것이다.
성분이 생긴 대로 산다. 사람은 자기 성분 생긴 대로 산다.
모든 만물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성분대로 살고 있다.
기는 놈은 왜 기는가? 생명의 성분이 그렇게 생겨서 기고 있다.
뛰는 놈은 왜 뛰는가? 생명의 성분이 뛰게 되어 있어서 뛰게 된다.
나는 놈은 왜 나는가? 생명의 성분이 날도록 되어 있어서 나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하려면 영생의 성분이 있어야 한다. 영생의 성분이 뭔가?
그것이 바로 하나이신 그리스도란 말이다.
이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에게 우리 성분이 되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그와 하나 될 때 그분의 성분이 내 성분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한 성분이 된다. 십자가 안에 있는 예수 안에서 발견된 내 자신으로
살아갈 때 영생을 사는 것이 된다. 영생을 산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영생을 살 생각을 해야지
죽어서 영원히 영원히 살아야 되겠다고 애굽의 바로들 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애굽의 바로들은 죽어서 영원히 살려고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그 안에 자신들의 시신들을 말려놓고 자신들의 종들까지 다 데리고 와서
말려서 그 무덤 속에 피라미드 속에서 자기들의 남은 생애를 살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3~4천년씩 살고 지금도 미이라가 안 썩고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그렇게 명태처럼 살 것이냐, 하나님 성분으로 살 것이냐는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성분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명태 모양으로 3천년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박물관에 가서 미이라를 봤다. 다 싸 놓고 발가락만 좀 보이게 해 놨다.
아직도 바싹 말라 있다. 명태 같다. 그렇게 오래 살면 뭐 하겠는가.
주의 성전에 한 날이 세상에서 천 날 보다 낫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 성분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명태 성분으로 만년을 사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이다.
우리는 영생을 살아 낼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생하는 양식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양식은 영생하는 양식이다.
이 양식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했다.
이것을 시간적으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떡을 통해서 금을 분배하는 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시는 분이다.
십자가에 죽은 그 운명을 통해서 우리와 하나가 되고
함께 참여하게 하고 참여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살아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도 당장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운명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 낸다면 우리가 살아 내는 모든 삶은
하나님을 살아내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살아내면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을 살아 내는 것이다.
진설상은 증거궤의 높이와 같다.
1.5규빗이신데, 증거궤도 1.5규빗이시고 상도 1.5규빗이시다.
1규빗은 대략 이 정도되는 길이다. 이 말은 증거궤의 높이와 같다.
이 말은 증거궤의 수준과 같다는 뜻이다.
증거궤는 무엇인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돌 판이 들어있는 궤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분배하기 위해서
말씀이라는 형태로 돌 판에 새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 증거판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십계명이라고 말하지만 십계명이 아니고, 열 가지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열 가지 방면으로 증거하고 있는 말이다. 하나님 자신의 증거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를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이 증거가 있는 것이 증거궤이다.
증거궤의 높이와 떡상의 높이와 같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말씀이 되고, 말씀은 떡이 됐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 보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 - 말씀 - 떡이 나왔다. 그 말씀과 떡이 같은 수준이라는 의미이다.
글로 써 놓은 돌 판에 새겨놓은 그것이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모양을 바꿔 놓은 것이다.
글자로 써 놓은 것을 보면 눈으로 보기만 한다. 먹을 수가 도저히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책에 써 놓은 것을 아무리 먹으려고 해보니 먹을 수가 있겠는가.
성경책을 그냥 갈아서 마실 수도 없다.
그래서 떡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갈아 마시게 할 수도 없으니 내가 생명이 떡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모두 다 자신을 분배하기 위한 수단이다.
알아듣게 하기 쉽도록 하신 것이다.
진설상은 증거궤의 높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하나님의 증거의 표준과 같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어떤 수준의 분이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준과 같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도달하신 하나님은 그 이상의 수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 수준 이상의 하나님은 없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도달하신 하나님 중에는 그리스도 이상의 수준은 없다.
증거판에 새겨진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수준을 느끼게 된다.
모세를 볼 때 하나님의 수준이 어떤 분인가를 느끼게 된다.
선지자들을 볼 때 하나님의 수준이 어떤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에게 도달하신 하나님의 수준은 그리스도 이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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