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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믿는다는 데서 먹는다로 바꾸어져야

잔잔한 시냇가 2009. 3. 28. 06:05

 

믿는다는 말속에는 대부분 상대적으로 의지한다는 뜻이 들어있다.

갓바위 부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속에는

나는 나대로 있고 그분에게 의지한다는 뜻이 된다.

그분에게 신뢰를 가지고 부탁한다는 의미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때 그런 식으로 믿게 된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다.


이것은 먹는 것과 다르다.

아무리 그렇게 믿어도 그분의 성분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다.

갓 바위에 다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갓 바위 부처님에게 빌어서 영험을 얻었다는 사람도 많고

도움을 받았다는 사람이 많다. 신앙심을 깊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갓 바위 부처님에게 가면 틀림없이 된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가 하면,

1년에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고 소문이 났다.

그렇게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 속에 갓 바위 부처님의 성분은 전혀 없다.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님께 기도하면 병을 고쳐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보면 예수님의 성분은 전혀 없다.

이 말은 먹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먹으라는 말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왔는데 모두 어떤 식으로 따라 왔는가?

모든 갓바위 부처님 믿듯이 그렇게 믿고 따라왔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처럼 그렇게 따라왔다.

많은 이적을 행하니까 이적을 보려고 따라왔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먹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처음부터 먹으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갓바위 부처님 믿듯이

예수를 믿고 따라온 사람이라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음식을 먹는 대로 바꿔야 한다. 그분을 먹는 대로 바꿔야 한다.

그분을 먹어서 그분이 독이면 내가 죽을 것이고, 그분이 약이면 내가 살 것이다.

믿는 것은, 내가 믿으면 이익이 되고, 안 믿으면 손해가 되는 것이지

내 자신에는 어떤 손상이 오지 않는다. 갓바위 부처님을 믿어서

소원성취가 안 되어봤자 본전이다.

 

어떤 사람은 당신은 왜 예수를 믿느냐고 하니까

안 믿는 것 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 믿었다가 지옥 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만의 하나라도 안 믿었다가 지옥가는 것보다

믿어 두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떤 장로님도 믿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믿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을 때는 다르다.

먹으면 그분이 내 속에 흡수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그분으로 화해지는 것이니까 내가 그분과 같아져 버린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을 운명이 되면 나도 죽을 운명이 되는 것이다.

다른 의미로 말하면 세상에서 몰려서 처형된 것이다.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박고 몰려서

결국 십자가라는 형틀에 매달려진 것이다.

내가 그분을 먹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되어서

나도 그분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지만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는 핍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다. 내가 예수를 믿다 보면

나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와 같이 그렇게 핍박을 받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먹는 문제는 그렇다. 믿는 문제는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믿었다가 불리하면 안 믿으면 된다.

내가 믿었다가 손해 될 것 같으면 안 믿으면 그만이다.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너희 속에 새기라, 나를 먹으라는 뜻이다.

우리는 ‘믿는다’는 데서 ‘먹는다’는 것으로 꼭 전환해야 한다.

‘믿는다’에서 ‘먹는다’로 전환해야 한다. 왜 먹는다는 말을 했을까?

지금까지 옛날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 믿는다 해왔는데

먹는다는 말을 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이상하게 불경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인가 하여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때도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수군수군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유태인들은 제 살이 뭐기에 지가 누구기에 제 살을

나눠준다고 하나하고 비난하게 됐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이 말을 함으로 거리낌이 되느냐,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이것은 상징적이라는 말이다.

살이라는 말은 상징적이다. 내 자신의 운명을 네가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먹도록 하려고 했는가?

믿기만 잘 하면 종교가 된다. 종교는 신앙심으로 되는 거니까

종교가 되는데 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살을 먹으라는 말을 했는가?

그분은 자신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 성분으로, 한 운명으로 동화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늘에 있고 나는 땅에 있어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관계가 아니라 신앙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분과 내가 한 떡이 되고 한 성분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먹으라는 말이 나왔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나를 경배해라고 말하지 아니한다.

찬양하라고 말 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하나가 되자고 말한다.

하나가 안 되는 한은 아무리 경배를 하고 아무리 믿고

신앙을 하고 충성을 하고 다 해도 둘은 서로 남남이다.
군대 가면 밑의 사람은 위에 사람에게 충성해야 한다.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군대니까 죽으라 하면 죽어야 되다.

죽을 자리를 뻔히 알면서도 가라고 하면 가야 된다. 그것이 군인이다.

분명히 자기도 가면 죽을 줄 안다. 보내는 사람도 보내면 죽을지를 안다.

그래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은

죽음을 자기가 앞에 두고 가는 것이다. 충성이다.

아무리 충성한다 해도 둘이 하나는 아니다. 둘은 따로따로이다.

명령 때문에 충성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두려우니까 충성하는 것과

그 분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여기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믿는다는 데서 먹는다로 바꾸어져야 된다.

그러지 않고는 기독교가 바꿔질 방법이 도저히 없다.

출처 :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살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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