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수의 웰빙 칼럼/전통문화

[스크랩] 옛 조경의 조성원리와 철학

잔잔한 시냇가 2011. 1. 6. 07:48

                          옛 조경의 조성원리와  철학

 

조경은 말 그대로보면 ‘景(觀)을 만듦[造]’이다. 매우 간결한 정의이지만 경관이라는 것 자체도, 또 그것을 만든다는 일도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매우 복잡한 정의라고 할 수있다. 경관은 보통 생각하듯 눈으로 보아 매우 아름다워서 즐거운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치’이기도 하지만, 생물이 자리잡고 살아가는 ‘토지’이기도하고, 또 이것을 확장한 ‘환 경’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관은 대체로 사람의 시야에 잡히는 크기 이상의 것이므로, 그것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조경을 매우 가볍게 여긴다. 그저 잘생긴 나무 심고 예쁜 꽃 심는 일, 집이건 동상이건 무언가 중요한 사물을 치장하여 돋보이게 하는 일, 망가뜨린 곳을 가려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 따위를 조경이라고본다. 이런 잘못된 인식이 형성된 데에는 물론 조경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잘못도있겠지만, 뒤떨어진 우리네 문화 수준 탓도 있다. 우리 옛 조경을 알기 위해서는 조경이 하는 이런 표면적인 일의 바닥에 깔려 있는 보다 근원적인 조경의 본분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 하나는 경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고, 또 하나는 토지를 쓸모있게 만드는 일이며, 나머지 하나는 `환경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이다. 이중에서 첫째 일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이고, 둘째 일은 최근 그 중요성이 두드러지는 일이며, 셋째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세가지 일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일들은 현대 조경은 물론 옛 조경에서도 다루던 것인데, 옛조경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그리고 다른 문화를 이루고 살던 그 시절에는 어떤 것들이 조경에 영향을 미쳤을까? 옛 조경에는 어떤 원리들이 작용했을까? 이런 매우 심각한 질문을 이 글에서 다 답할 수는 없겠지만, 이 글을 읽고 난 분들이 우리 옛 조경을 더 잘 알고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또 오늘 조경을 더 잘 할 수 있는 문화를 이룩해 주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연다.

 

아마도 우리 옛 조경의 예를 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창덕궁 비원이나 안압지를 떠올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담양 소쇄원이나 보길도 세연정계원을 떠올릴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안동 병산서원이나 승주 송광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전 국방방곡곡의 정자와 누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낙안읍성 등을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궁궐과 어울리는 궁원, 민간의 제택이나 별서, 서원이나 사찰과 어울리는 정원 또는 원림, 그리고 독립된 누정, 집합 경관을 이루는 옛 마을 그 자체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물론 이것들이 순수한 조경인지, 아니면 건축이 우선하는 것 인지, 아니면 생활환경인지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 조경의 일이 이루어 낸 경관이고, 토지이고, 환경임에는 틀림없기에 옛 조경의 모습을 살펴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조경에서 공통된 점은 모두 집 밖에있는 천연의 경관을 취하여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조경을 ‘취경(取景)’이라고 하자. 이런저런 옛 조경, 취경중에서 현대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는 것은 궁궐이나 민간 제택이나 별서의 조경일 것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능력이 닿으면 갖가지 호사를 하려고 하는 일반적 심성에 바탕을 둔 세속적 조경이기 때문이다. 특히 궁궐은 매우 넓은 땅을 차지하는데다 대체로 산기슭에 자리잡으므로 원래 주어진 경관이 아름답고 환경이 건강하다. 이런 땅의 지형과 물길을 가다듬고 나쁜 식물을 솎아 낸 다음에 부분적으로 선경(仙境)을 베푸는 형식을 취하므로, 원래는집 밖의 천연경관을 베끼듯 하는 조경, 즉 ‘사경(寫景)’으로 이루어진다. 판소리 <춘향가>에는 춘향의 집을 묘사한 대목이 나오는데 비록 상상 속의 조경이기는하지만, 소나무.대나무와 같은 기품 있는 수목으로 큰 틀을 잡으면서 기화요초(琪花搖草 )가 만발한 선경을 펼쳐 보인다. 이런 조경이 판소리에 나오는 걸로 보아 옛 조경에서는 마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원래 갖춘 자연환경과 경관의 조건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담을 둘러친 안쪽에는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만 골라심고가꾼 형식이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케 한다. 아무 곳에나 짓지 않고, 아무것이나 다 쓰지않고, 그 장소와 요소를 특별히 고른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조경은 ‘선경(選景)’이다. 그러나 비단 우리 옛 조경에만 해당하지 않고 동서고금에 두루 해당하는 이런 호사스런 조경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없으면 또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유하면서 안목 이 있으면 비원이 되고, 돈 많고 천박하면 놀부네 집이 되며, 찢어지게 가난해도 갖추고자 하면 장승업네 집이 된다. 그리고 크게 꾸미지 않더라도 격조 높은 조경을 이룰 수 있음은 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왕산 골짜기 집 인곡유거(仁谷幽居)나 단원 김홍도가 살았던 단원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러한 절제된 조경의 극치는 김장생의 다음 시조에서 펼쳐진 상황이아닐까한다.

 

十年을 經營하야 草廬 한 間 지어내니
半間은 淸風이오 半間은 明月이라
江山을 드릴 듸 업사니 둘너두고 보리라.

 

이 집은 이미 자연의 극치인 청풍과 명월로 가득 차 있으니, 굳이 집 밖의 경관을 집 안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이는 집 밖의 경관을 집 안에서도 능히 보고 즐길 수 있는 ‘차경(借景)’을 이룬 상황이지만, 한 걸음만 나서면 집 둘레의 경관을 쉽게 즐길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차경은 말 그대로 남의 경치, 임자 없는 경치를 돈 안 내고 빌려 와서 본다거나 거저 훔쳐본다는 뜻이라서, 대개 가장 좋은 경치를 독점하기 위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조경을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한 차경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경관, 고정된 경관을 초월하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경관, 유동하는 경관이다.
찬 겨울 바람에 고고한 향을 날리는 매화,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들가지와 새싹, 은빛 물결과 노니는 원앙, 대바람·솔바람 소리, 장대비를 후드득 맞고 있는 파초 잎, 햇빛 너머로 비치는 단풍잎, 온 누리를 뒤덮는 흰 눈, 삭풍에 흐느끼는 나뭇가지 등,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경관, 자연의 신비한 변화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 조경이 바로 진정한 차경의 경지다.
이런 경지의 차경은 이미 집 밖으로 나선 상황이 되니, 경관을 생활 가까이 끌어오는 취경과는 반대로 사람이 경관 속으로 들어가 노니는 경지인 ‘유경(遊景)’이 가능해진다. 이는 사람이 집을 나서서 천연의 경관 속을 이동하는 방식이며, 그것도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유람, 거닐면서 노닐면서 보면서 즐기면서 나아간다는 방식이다. 현대의 우리는 이것을 탐방 혹은 관광이라고도 하고, 회유라고도 하여 조경의 본류라기보다는 지류로 보지만, 어쩌면 이것은 조경의 본원인지도 모를 정도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성취는 과학의 지식과 탐험이라는 행동, 관조라는 의식, 즐거움에 대한 감수성,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그것을 찾아 나서는 용기, 그리고 고도의 설계와 섬세한 시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거칠고 낯선 원생의 자연 속을 용감하게 돌아다니는 ‘탐경(探景)’도 있지만, 곳곳의 명승과 그 명승에 베풀어진 정자 등과 같은 시설을 빌려 즐기는 ‘점경(点景)’이라는 방식도 있다. 겸재, 단원, 오원 같은 화가들과 수많은 문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경관을 즐긴 문화는 중요한 유산이다.
그런데 이 유경은 반드시 현장으로 사람이 몸소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그 묘미가 있다. 이것은 때로는 작지만 깊은 뜻을 담은 ‘축경(縮景;작은 뜰 정원, 더 작은 석가산이나 수석)’을 의식 속에서 거닐면서도 가능하고, 벽에 걸린 산수화라는 사이버 공간에서도 가능하다. 이것은 매우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이면서 매우 문화적이고 사이버적인 조경이라 할 수 있는데, 이보다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있는 것은 바로 ‘의경(意景)’, 즉 뜻으로 이루는 조경이다. 즉 의경은 괴석 한 점, 나무 한 그루, 지당(池塘) 한쪽을 집 안에 두고, 그것에 실재하는 자연경관의 의미를 추상화하거나 상징화하여 대신하는 방법이다. 더 나아가 그런 뜻을 담은 글이나 그림을 암벽·담·건물의 벽 등에 직접 쓰고 새기거나, 편액이나 주련으로 만들어 붙여 그 경지를 즐기기도 한다.

사실 조경이나 건축 또는 여느 예술이 다 그러하듯, 어느 누가 먼저 이론과 방법론을 만들어 퍼뜨린 다음에 설계가나 예술가가 그 이론과 방법론에 따라 창작하고, 일반 대중이 그에 따라 향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천재가 했든 둔재가 했든 문외한이 했든 간에, 수많은 창작과 모작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어떤 원리 또는 방식이 자리잡는 것이며, 우리 옛 조경 또한 그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옛 조경을 돌이켜 볼 때 그런 조경을 가능케 한 바탕으로 몇 가지를 내세우고 있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 경관의 바탕을 이루는 자연적 특성을 알아보자.
우리 나라는 자연경관이 주로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는 늘 산에 기대고 산을 끼고 산을 본다. 그 산의 능선은 분수령을 이루니 골은 결국 수계(水界)를 이뤄 농사짓고 물 먹고 사는 우리네 삶의 터전은 수계를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삶터는 늘 산과 물과 어울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사철이 뚜렷한 기후와 계절상의 변화는 자연 식생과 동물상에도 뚜렷한 특징을 지운다. 그러나 환경조건에 맞춰 피고 지는 꽃들은 매우 귀한 편이고, 오히려 여름의 녹음이나 가을의 단풍이 우리에게 익숙한 경관이다. 특히 여름에는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중요하므로 녹음수를 좋아하고, 겨울에는 헐벗은 산야에 생기를 이어 가는 상록수를 좋아한다.
이러한 한반도의 자연환경은 매우 특징 있는 삶터를 이루어 내었으니, 이른바 ‘명당(明堂)’의 개념이다. 대체로 바람을 간직하고 물을 얻을 수 있는 [藏風得水] 곳, 산을 등지고 물을 낀[背山臨水] 곳을 명당이라고 한다. 이런 곳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고 바라마지 않는 삶터의 환경이다. 풍수지리를 미신이라고 낮춰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곳은 현대과학으로 따져 보아도 한국의 자연환경 조건을 잘 살려서 골라 낸 좋은 환경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자연경관이 전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몇 개의 사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선경(選景)’의 입장으로 나타나고, 결국 원생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범상한 수준을 넘어선 ‘명산대천(名山大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 선경에 의한 자연경관의 구성방식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표현되는데, 그 중에서 자연경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승경(勝景)’이다. 그것은 일정한 구역의 자연환경을 범위로 하여 그 경관을 대표하는 수려한 사물에 집중적으로 뜻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관동팔경,남산팔경 등이 대표적인 예다. 또 장생불사를 표상하는 열 가지 경물이 어울린 경관을 그림,자수 등의 형식으로 표현한 십장생도(十長生圖)도 좋은 예다.
사실 이러한 명당과 승경은 엄밀하게는 자연경관이 아니라 문화경관의 영역에 걸치니, 이것이 한국인을 위시한 동양인의 경관관을 설명하는 특징이다. 명당에 있어서도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모자라는 것은 채우고[裨補] 넘치는 것은 누르는[壓勝] 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승경도 고유한 명칭을 부여한다든지, 건물 등 경물을 추가한다든지 하는 문화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원생자연을 대상으로 한 경관은 결국 문화화된 자연경관이라는 점이 명백해진다. 그러면서도 과도한 변화보다는 현명한 적응을 꾀한 옛 사람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보기에 좋은 떡은 먹기에도 좋듯” 한국인이 좋아하는 경관은 그저 보기에 좋은 경관이 아니라 살기 좋은 환경이다. 그것은 그저 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환경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 경관도 단지 보기 좋은 경관에서 나아가 ‘뜻있는’ 경관으로 여긴다. 이런 생각들이 우리 옛 조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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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기 원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 『책 같은 도시 도시 같은 책』, 『조선조 정원의 원형』, 『한국의 전통 정원』(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글 출처 : 문화와 나/2002년 여름

출처 : 나무과자
글쓴이 : 순돌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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